瑞山磨崖三尊佛에서 <歲寒圖>까지
-無爲自然을 추구한 拙樸의 美-
인간은 주변에 처해진 자연·인문적 환경의 영향을 받고 산다. 인간을 둘러싼 인문·자연환경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기에 수시로 바뀌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자연환경은 인문환경에 비해 수없는 세월이 흘러도 미처 못 느낄 정도로 변함이 둔하다. 그래서 한국 미술의 특징을 논함에 있어 한국의 자연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의 자연은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띠며 ‘맑고 시원하고 투명한 사계절’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부드럽고 온화한 자연에 순응하며 그들과의 조화를 꾀하면서 살아 왔고, 인위적인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적 풍토 속에 길들어진 한국인의 기질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자연스럽게 민족의 유전자로 전승되어 왔다.
한국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기고 존숭되었던 것도 바로 자연과의 조화이며, 그래서 인위적 행위에서 오는 ‘번잡성(煩雜性)’을 최대한 걸러내고 무위자연의 상태로까지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마애불이 바로 이러한 무위자연에서 오는 ‘拙樸한 맛’을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한국의 마애불은 자연이 주는 질감을 그대로 살려 새길 것만 새기고 더 이상의 구차한 사설은 허용하지 않았다. 서산마애삼존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의 경우 삼존 상만으로 전체 28품으로 구성된 법화경을 일갈(一喝)해 버렸다. 석굴암이 화엄사상이니 법화사상이니 할 것 없이 팔만사천의 대장경을 모두 함축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도의 아잔타·엘로나 석굴이나 중국의 운강·용문석굴에 새겨진 마애불처럼 자연에 도전적이지도 않으며, 구구절절한 군더더기가 붙어 번잡하기 짝이 없는 것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다.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 전경>
서산마애삼존불의 터질 듯 말 듯 절묘한 순간을 포착한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조차 대들 수 없는 한 터럭의 인간의 기교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이 깨달음에서 오는 법열(法悅)의 미소는 세속의 ‘탐진치(貪嗔癡)’ 삼독심(三毒心)을 단번에 일소시키고, 마애불과 인간을 자연스러운 교감과 소통을 통해 물아일치의 세계로 인도하며, 결국에는 자아(自我)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나아가게 한다. 일연(一然)스님도 석굴암을 관상하고 생동하는 완벽성에 깜짝 놀라 그 해법을 인간이 아닌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완성했다고 했듯이, 만약 서산마애삼존불도 보았다면 이 역시 천신이 내려와서 완성했다고 할 법하다. 그 만큼 서산마애삼존의 ‘졸박(拙樸)’함에는 신운(神韻)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 서산마애삼존불상 중 좌협시보살상의 미소 >
이러한 마애불의 ‘拙樸’한 정신은 홀씨가 되어 몇 백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김정희의 문예정신에까지 뿌리내렸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拙樸’하기 짝이 없지만, 완당의 삶과 사상, 그리고 문예정신이 합일(合一)된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국보 제180호 세한도 >
<세한도>는 한 채의 집과 소나무·잣나무 다섯 그루를 소략히 그린 전형적인 문인화로, 꿋꿋이 역경을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고 견정(堅定)한 의지가 서려있다. 그림은 예찬의 화풍을 따르고 있지만, 갈필과 건묵을 능숙히 구사하면서 그린 고졸한 소나무와 집은 김정희 특유의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다. 이곳에 기교를 부려 윤기(潤氣)나는 소나무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그렸다면 여백에 서려있는 세한의 정취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한도>의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가 들어 올 틈이 없고, 거칠고 졸박한 필치로 선비가 추구해야 될 최고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무위자연에서 오는 신운(神韻)이 느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 는 그동안 잠재되어 흘러온 ‘담박소쇄(淡泊瀟灑)’한 한국미술의 마지막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 손 영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