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이장호 감독, 그의 멜로디가 멈춘 곳 전주전동성당

chamsesang21 2009. 7. 8. 15:59

월간문화재사랑
2009-06-08 오전 09:29



옛 이야기와 만나는 곳
 
고요한 우리의 옛 가락이 잔잔히 흐르다가 멈추었다. 작은 도시 가운데 얼굴을 내민 풍남문에서 말이다. 그를 영화에 발을 디디게 한 아버지는 그의 평생에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괴테의 명언을 떠올렸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라는 말. 그의 흥얼거림은 전주의 낮은 가옥들을 지나 이곳에서 맴돌다가 가락의 절정에서 멈추었다. 풍남문은 전동성당을 가기위해 들려야 할 곳이었다.

보물 제308호로 지정된 풍남문은 전주읍성으로 험한 세월을 견뎌온 소중한 문화재이다. 풍남문은 1층의 기둥을 2층까지 그대로 올려 모서리 기둥으로 사용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닌 문루門樓였다. 건축 공부에 한창이었던 적이 있던 청춘시절을 기억하듯 풍남문의 이곳 저곳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2층에 올라 옛 사람들의 삶을 실감하며 옛 건물들의 가치에 대해 되뇌고 있었다. 풍남문에서 바라보니 현대식 건물들이 풍남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주변 풍경이 옛 사람들의 값어치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탓인 양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문화재가 교도소처럼 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더 잘 살게 된다면 정체성 없는 우리 주변의 많은 건물들이 옛날 우리 전통의 가치를 담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 보았다.

사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전동 성당이 풍남문 바로 밖에 세워지게 된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회 최초의 치명순교자가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197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고산 윤선도의 6대 손인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의 참수가 행해졌던 곳이다. 당시 풍남문은 그들의 참수를 지켜보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순교 위에 세워진 전동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교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던 조선시대에 천주교를 탄압했던 곳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단단한 그 신앙의 요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풍남문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 도전을 받고 있었다.





오늘의 이야기를 내려놓는 곳

그에게서 거룩한 성가가 흘러나오다가 또 그 절정에서 멈추었다. 멜로디가 동결된 그곳, 이제 그는 전동성당 앞에 서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완전한 격식을 갖춘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있다. 그는 1908년부터 짓기 시작해 1931년에 완공된 대 역사의 산물에서 하나의 건축물을 짓기 위한 하나 하나의 노력들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돈을 절제하기 위해 생산되는 오늘 날의 여러 건물들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각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효과보다 작품위주의 순박한 생각들로 만들어 낸 건물이 많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예술적인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그가 우리의 전통 건물이 많은 그날을 꿈꾸는 것도 그런 사람들을 그리워해서 일 것이다.



그는 오래된 것들은 과거를 돌아다보게 하는 영향력이 있다며 눈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오래된 것들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그는 세세한 정성이 깃든 전동성당을 찬찬히 눈에 담아 두며 날씨도 좋은 오후의 여유를 만끽했다. 지방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된 사제관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의 성당 옆 잔디밭에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즐겁게 했다. 한참동안이나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는 이곳이 천국이라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이미 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아름답게 소화시키는 성당의 오색 빛깔 창들에 새겨진 성서 구절들을 조용히 읽기시작 한다. 그는 조금 뒤쪽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기도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 수많은 유명한 영화들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살아 있는 역사로 존재하는 그가 신 앞에 작은 자로 앉아 그의 것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사람들과 호흡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함께하는 성당은 오래된 문화재이지만 건강한 생명이 있는 문화재였다. 





내일의 이야기를 듣는 곳

예향으로 불리는 전주에서 그 끼를 가진 학생들을 십년이 넘도록 가르치고 있는 그에게 전주는 쉼터와 같다. 서울을 벗어나 매주 전주로 향하는 여행 속에 전동성당과 같은 문화재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한다. 그는 우리들의 수준 높은 문화의식이 문화재를 보존해 나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주변 것과 지나간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이 시대에 각자 자신을 사랑하듯 문화재와 주변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런 마음가짐이 문화재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를 찍으면서 문화재와 함께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독특한 문화재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문화에너지라는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미 문화 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을 받기로 한 이 프로젝트는 전주대, 전주시, 전라북도와 제휴해 한식의 세계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쿡팝 Cook pop’이라는 브랜드로 문화스토리를 만들어 뮤지컬도 만들고, 한식을 세계화하는 셰프 발굴도 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의 전통음식을 문화재로 세계화시키려는 것이다. 오래되었지만 도시 속에 함께 존재하기에 잊을 수는 없게 만드는 풍남문, 오래되었지만 성당을 찾는 이들과 여전히 함께 숨쉬고 있는 전동성당에서 그는 오래된 것들을 미래의 것으로 만드는 문화재 사랑의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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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ㅣ 70년대 <별들의 고향>으로 등장해, 80년대 새 바람을 일으켰던 영화감독이다. 20대에 내놓은 첫 작품<별들의 고향>(74)으로 서울 관객 46만 명을 넘기며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바 있는 그는 영화계의 전도유망한 신인이었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절은 그에게서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을 앗아갔고 4년간의 방황의 시간을 보낸 후 비로소 현실에 눈을 뜬다.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계속해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87),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89)과 함께 1980년대 영화계의 진주 같은 작품들을 쏟아 놓는다. 1982년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1987년 백상예술대상 특별상, 2003년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은 바 있다. 2009년 현재, 그는 전주대학교 영화영상전공 교수로 강단에 서서 학생들과 함께 열정을 풀어 놓고 있으며, 대학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내년에 새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 2010년은 그가 다시 데뷔하는, 후반기 인생의 시작이 될 것이다.


글·김진희 
사진·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