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한국의 전통정원과 그 속의 상징세계

chamsesang21 2009. 6. 29. 19:38

월간문화재사랑
2009-06-08 오전 09:30

 


인문화 된 산수정원

사람이 산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주변 풍광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 교감을 나누면 어느덧 자연은 감상자의 심정적 소유물이 되면서 인문화 한다. 이렇게 인문화된 자연은 이미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제2의 자연이요 정원화 된 자연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산과 바위 등 자연물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거나 상징 경물景物 주변에 배치하고 즐긴다고 하면 산수 자연은 명실상부한 정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 속에 산재하고 있는 상징 경물에는 선계仙界에의 동경심, 선현의 행적과 사상을 흠모하는 상고주의 정신,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인간적 욕망 등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각 경물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읽어내면 정원 주인을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현실적인 욕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정원 속에는 상징 경물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것 몇 가지만 골라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지상에 구현된 선계
-삼신산

삼신산이란 신선사상이 창조해 낸 이상향으로, 봉래·방장·영주의 세 선산仙山 말한다. 현존하는 전통 정원 중에서 삼신산 관련 유적을 찾아본다면, 청평사 문수원정원 영지影池, 경복궁 경회루 연지, 경주 임해전지 연못, 남원 광한루원 연지, 안동 풍산읍의 체화정 연지, 화순 임대정 연지의 삼신산이 있다. 그리고 연못은 아니지만, 창덕궁 낙선재 후원에 있는영주瀛州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조石槽 신선사상과 관련된 유적에 포함된다. 삼신산 혹은 삼신선도三神仙島 대한 관념은 중국 고대 제나라의 팔신八神 제사로부터 형성되었다. 제나라는 중국 북동 지역 산뚱山東반도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로서 해안의 명산名山 대상으로 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산에 제사지냈던 무당들은 삼신산이 바다 가운데 있다고 믿었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의하면, 삼신산은 멀리서 보면 구름처럼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금시 물밑에 있고, 더 가까이 다가가면 바람이 몰고 가버려 다다를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삼신산에는 불로초가 자라고, 하늘을 나는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으며, 초목과 금수는 모두 희고,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지은 궁궐이 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삼신산을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원천적 자유를 누리며 영생하는 신선들의 거처로 믿었고, 그들에게 있어 삼신산은 환상의 세계요 신령스러운 선계였다. 한정된 수명과 현실적 한계를 절감한 사람들은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세계에서 신선처럼 영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염원했다. 정원 속의 삼신산은 바로 그러한 이상과 욕망의 상징물인 것이다.
 

이상세계에의 동경-연못가의 거북이

현존 정원 유적 가운데 연못가에 거북이(혹은 자라)가 있는 곳은 남원 광한루연지와 창덕궁 후원 청심정 앞 빙옥지氷玉池이다. 크기나 모양은 같지 않으나 머리를 물을 향해 두고 있는 모습은 같다. 거북이는 실제로 이 땅에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낙서洛書 등에 지고 올라온 신귀神龜로서 전설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십장생의 하나로 널리 애호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별주부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비석의 귀부처럼 용생구자龍生九子 하나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옛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북이는 평범한 갑각류의 하나가 아니라 초월적 이상세계에 사는 신비로운 동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북이가 현실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커다란 상서祥瑞, 길상의 조짐이었던 것이다. 광한루와 청심정의 거북이는 바로 그러한 상징성을 가진 거북이다. 이 거북이가 주변 일대를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으로, 상서와 길상이 충만한 선계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선비의 높은 기상과 굳은 지조
-지주암砥柱巖

경상북도 봉화의 청암정 남쪽 계곡의 수명루 앞을 흐르는 계류 속에지주암砥柱巖이라고 새긴 큰 바위가 있다. 지주砥柱 중국 허난성 섬주陝州에서 동쪽으로 사십 리 되는 황하 중류 가운데 서있는 바위로, 위쪽이 벼루처럼 평평하고 모양이 기둥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불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바위를 애호한 것은 그 기묘한 형태가 아니라, 천하 만물을 쓸고 가는 황하의 격류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고고한 자태였다. 은나라 의열義烈이었던 백이·숙제의 무덤 근처를 흐르는 항류抗流 가운데도지주중유砥柱中流라고 새긴 바위가 서있다. 수명루 주인 역시 수명루 앞 계류의 중류에 우뚝 솟은 바위에지주砥柱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는 처음 이 바위를 보고 황하 격류 속의 지주암을 연상했을 것이고, 백이·숙제의 항류의 지주암도 생각했을 것이다. 수명루 앞의 바위는 이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평범한 바위에서 지조와 절개의 상징형으로 탈바꿈했다. 수명루 주인은 계류의 바위에 단 세 글자를 새겨 수명루 일대를 백이·숙제가 은둔했던 수양산首陽山 같은 곳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우주 원리와 군자의 면모
-연못

전통 정원의 연못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방지원도형 연못이다. 이것은 네모난 연못의 중심에 둥근 섬을 조성해 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창덕궁 후원 부용지, 경복궁 향원지,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그리고 논산 윤증고택, 강진 다산초당, 담양 명옥헌 정원의 연못 등이 있다. 방지원도형 연못의 형태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는 고대 동양인의 우주관이 투영돼 있다. 천원지방이란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이지만, 이 말 속에는 음양陰陽·천지天地·건곤乾坤·상하上下·동정動靜이라는 우주 만물의 존재와 운행의 이치가 함축되어 있다. 말하자면 방지원도형 연못은 바로 지상에 구현한 우주적 이미지인 것이다. 연못은 연지蓮池라는 말 자체에 이미 답이 나와 있듯이 연꽃과 밀접하게 관련 돼 있다. 

옛 정원, 특히 궁궐정원이나 낙향한 사대부들의 별서정원別墅庭園 연못에는 연꽃이 없는 경우가 드물었다. 왕공 사대부들이 연꽃을 애호했던 이유는 연꽃이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면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그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칭송했고,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은 것을 상찬했다. 줄기 속은 비어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자라거나 가지 치지 않고, 멀수록 더욱 맑은 향기를 사랑했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군자의 자태를 사랑했다. 연못의 연꽃은 조선 유학자들의 감정이입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주거 공간을 산수화山水化 하는-괴석怪石

서양이 훌륭한 암산巖山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위를 정원의 경물로 삼는 일이 없고, 오히려 동양의 사람들이 바위를 애호했던 까닭은 서양에는 돌을 애착하는 마음이 없고 동양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위는 겉보기에 그저 평범할 뿐 아무 관심 끌만한 요소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옛 사람들은 그 평범하고 특별한 경관이 아닌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었다. 괴석 애호는 상황에 따라서 호사로운 취미로 매도되기도 하지만 정원에서 괴석이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높다. 자연계의 꽃과 풀이 자기 본래의 의지를 지키지 못하고 계절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만, 바위는 그런 것을 초월해 태초의 견고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벗 삼을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괴이한 모양을 한 괴석이건 매끈한 수석이건 간에 지금의 돌의 모습은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가장 안정된 상태로 된 것이다. 돌은 그렇게 항구 불변의 안정된 상태에 다다르기까지 온갖 군더더기를 제거해 왔다. 약한 곳은 깎이고, 모난 곳은 다듬어져 더 이상 덧붙여진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점, 이것이 옛 사람들이 돌을 사랑했던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괴석을 정원에 끌어다 놓고 그것에서 대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그 정취를 즐겼다. 돌에 낀 푸른 이끼나, 어쩌다 떨어져 그 위에 얹힌 낙엽에서 깊고 오묘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비가 와서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보고 넓고 깊은 산수 자연의 풍경을 본다. 땅에 드리워진 돌 그림자에서 산 그림자의  그윽한 청취를 느끼고, 뚫린 구멍에서 깊고 유현한 동굴을 생각하였다. 이렇듯 괴석은 자연에 귀의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일으키고 상상력을 발휘케  하여 대자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괴석은 한낱 석분에 심어진 괴이한 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생활공간 전체를 산수화山水化하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행단-은행나무

사대부들이 정원수로 세한삼우歲寒三友 사군자를 즐겨 심었던 것은 그의 외형적 아름다움보다도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닮은 생태적 속성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기상, 잔설 속에서도 꽃 피우는 청빈과 은일, 이러한 자태를 사랑하여 그들을 정원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이와 달랐다. 서울 문묘 대성전 주변, 지방의 서원과 향교, 그리고 영양 서석지 정원, 아산 맹사성 고가 정원 등 사대부들의 정원에서 은행나무를 볼 수 있는데, 모두 공자孔子 인품과 사상을 흠모한 유학자들이 마음의 징표로 심은 것이다. ≪장자莊子어부편에, “공자가 지유緇惟 숲 속에 나아가 행단에 앉아 쉴 때 제자는 독서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고 노래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북송 건흥연간에 공자의 강단 옛터에 단을 쌓고 주변에 은행나무를 심어서 행단을 복원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청나라 초 고염무는 행단은 고대高臺 우의적 표현일 뿐 실재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이 어떻든 장자 이래로 행단고슬杏壇鼓瑟 공자의 강학講學 고사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옛 유학자들은 공자를 유교철학의 비조로 추앙했으며, 공자의 학행과 덕행은 성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정원에 은행나무를 심었던 것은 공자의 행적과 사상을 상기하고 학행學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원의 은행나무는 주관적 관점에 일단 여과된 은행나무이므로, 그것은 나무이면서 나무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정원은 기본적으로 상징 경물로 조성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원 주인들은 나무 한그루를 심어도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며 심었고, 바위 하나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떠올리며 들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빌려 온 자연 풍광까지도 정원 주인의 주관적 서정성에 입각한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원의 경물들은 정원을 조성한 사람의 인생관이나 생활철학, 또는 현실적 욕망 등의 내용을 은밀히 누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시각적으로만 반응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옛 정원을 바라본다면 한국 정신문화의 한 갈래인 정원 문화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글·사진 |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