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봄, 강화도에 살던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라는 선비가 여행길을 떠났다. 돌아와서 ≪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한권의 책을 썼는데,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은 곧 ‘강화기행’이니 고향을 여행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여행한다는 것이 어딘지 어색하다. 하지만 그는 강화도의 거의 모든 마을이라 할 수 있는 200여 곳을 직접 가서 살펴보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서 그 마을들을 주제로 모두 256수의 한시(漢詩)를 지었고, 거기에 덧붙여 마을 유래와 자연 경관, 풍습, 주민들의 생활모습 등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심도기행≫이란 기행시문집을 지었다.
그는 책의 맨 첫머리에 '강화도 전체의 자연과 역사 유적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고 여행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두두미 마을을 출발하여 강화도를 일주하고 다시 두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인근의 몇몇 명소를 둘러 본 것이 아니고, 강화도 거의 모든 마을을 직접 답사했다. 자신을 키워준 삶의 터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근대 서구 문명에 의해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점차 사라져 가던 무렵이었고, 일제에 의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였다. 순례자가 되어 어떻게 변할지 모를 고향 강화 땅 구석구석을 돌며 가슴으로 느끼려 했다. 직접 가서 보고 거기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분량이 적지 않다. 100년 전 강화도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특히 산문으로 기술된 부분은 강화의 자연경관 풍속 생활상 인물 등에 해한 풍부한 자료를 전해주고 있다. 기행시문집으로, 지리지로, 민속지로도 손색이 없다.
고재형의 ≪심도기행≫(고승국 소장) 표지 ≪심도기행≫의 본문 부분
요즈음 '걷기운동'이 큰 흐름으로 퍼져가고 있다. 아름다운 도보여행길의 발굴이 한창이다. 걸어야 느낄 수 있고, 되도록 천천히 걸어야 더 많은 것을 보고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강화도의 옛길을 걸으면 우리는 아득한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 국토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겪어온 영광과 수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3천여 년 전에 진지한 자세로 고인돌을 세우던 선사시대 조상들의 목소리도, 7백여 년 전 대제국 몽골에 맞서 싸우려고 북산 아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던 고려인의 비장한 음성도 들을 수 있다. 고려의 온 국민이 정성을 모아 완성한 팔만대장경 경판을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봉안하고 모두 함께 감격하던 그날의 분위기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던 백운 이규보 선생의 목소리도, 참된 지식인의 자세를 보여준 하곡 정제두선생의 가르침도 우리는 강화도에서 만날 수 있다. 140여년 전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가고 궁궐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 주민들의 안타까운 한숨소리도, 며칠 동안만 피난하면 곧 돌아갈 줄 알았던 50년 실향민의 망향가도 들을 수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역사의 섬 강화도의 오래된 길을 걸으면 역사를 보는 안목을 더욱 넓힐 수 있다. 역사 속으로 떠나는 이 강화도 도보여행의 본보기는 100년 전 고재형 선생의 ≪심도기행≫에서 찾을 수 있다.
≪심도기행≫에서 고재형이 걸었을 강화산성 길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김형우 감정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