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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위해 왜를 이용했던 가야 소국들

chamsesang21 2009. 5. 24. 12:39

생존 위해 왜를 이용했던 가야 소국들 [2009.05.22 제761호]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왜와의 동맹에서 백제에 밀리며 결국 신라에 병합…
<일본서기>의 일본부는 아라가야의 대왜 관계 전담 부서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일언폐지하자면 ‘1강3약 구도’라고 할 만하다. 이미 ‘노(老)강대국’이 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 백제, 대가야(고령) 등 상대적 약자들을 지속적으로 군사로 압박했는데, 481년 고구려의 신라 침입 때 백제와 대가야가 공동 구원했던 것처럼 약자들끼리 일종의 ‘공동 전선’을 펼치면서도 서로 암투를 벌였다.

» 무령왕릉(왼쪽). 훌륭한 목재는 백제에도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무령왕의 관을 짤 재료로 일본열도의 희귀 목재인 금송이 이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혈맹’에 가까운 백제와 왜국의 정치적 관계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스미다 하치만 신사의 구리거울(오른쪽). 무령왕이 등극하자 바로 이 거울을 가와치 지방의 공인들에게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왜국 군주 및 유력 왕족과의 관계를 치밀하게 챙긴 무령왕의 속셈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신라와의 각축에서 왜국의 지원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왜와의 관계에서 돌파구 찾던 백제와 가야

이 암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보게 되는 약자는 단연 대가야였다. 백제만 해도 6세기 초반에 걸쳐 계속 영산강·섬진강 유역 등을 영토화해 오늘날의 충남과 전북, 전남을 아우르는 강력한 영역국가를 건설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같은 시기의 신라도 백제가 이미 4세기 말에 다잡은 관료적 지배구조를 급속하게 만들어가면서 그 권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대가야는 오늘날 경북 고령 지역의 비좁은 땅만 직접 지배했을 뿐 아라가야(함안)나 다라국(합천), 탁기탄(영산·밀양), 탁순(창원), 이미 쇠약해진 가락국(김해) 등에 대해선 간접적으로 영향력만 행사할 수 있었다. 가야의 군소 세력 중에서는 최강이지만, 백제·신라에 비하면 상대적 약자인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를 ‘이이제이’ 전략으로 서로 견제케 해야 하는 잠재적 ‘강적’으로 봤다.

그러나 5세기부터 기근과 농민 반란,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위기를 겪은 백제도 고구려나 신라와의 경쟁에 자신을 가질 만한 처지가 전혀 되지 못했다. 이런 형편에서 백제에도 대가야에도 외부적 지원이 대단히 중요했는데, 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이웃이란 왜국 말고 없었다. 그리하여 6세기 초반에는 백제도, 대가야 등 가야의 여러 세력들도 왜국에 대한 ‘구애 작전’을 벌였다. 고구려가 한반도를 호령하고 신라가 날로 강해지는 상황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백제나 가야로서 유일한 돌파구로 보였다.

6세기 초반의 가장 귀중한 왜국 유물 중 하나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 늘 등장하는 와카야마현 스미다 하치만(隅田八幡) 신사의 사람 그림이 있는 구리거울(人物畵像鏡)이다. 중국산 구리거울을 본떠 서왕모 등 중국 신화의 주인공들을 형상화한 ‘모방 거울’인데, 48자나 되는 그 명문을 보면 계미년(503년으로 추정됨)에 사마(斯麻), 즉 백제의 무령왕(재위 501∼523)이 왜국의 대왕(大王)과 ‘남제왕’(南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만들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무령왕이 특별히 언급한 ‘남제왕’이 바로 <일본서기>의 오도노 오키미(男大迹王), 즉 나중에 게이타이 천황(507∼531)으로 등극할 왜국의 왕족을 의미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한데, 그렇게 볼 경우에는 이 구리거울이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 사이의 긴밀한 동맹관계의 성립을 알리는 유물이 된다.


 


그 ‘혈맹’ 관계는 왜국의 역사에도, 백제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 백제가 가야를 제쳐놓고 대륙의 선진 문화를 일본열도에 전해주는 ‘유일한 창구’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513년에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중국계 귀화인으로 추정되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파견하는 등 일본열도에 유교의 씨앗을 뿌렸다. 오경박사와 같은 귀화인 계통의 고급 지식인을 보유하지 못한 대가야는 이 분야에서 무령왕과 아예 경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6세기 초반부터는 일본열도 귀족층의 고분에서 대가야 계통의 유물 대신에 관모나 유리옥 등 백제 계통의 유물들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아스카(539∼710) 시대 일본 고대 문화의 기반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에서 닦아지게 된 것이다.

귀화인·거울 등을 뇌물로 활용한 백제

둘째, 무령왕의 고급 귀화인이나 구리거울 등의 송부는 ‘단순한 선물’이라기보다는 분명한 대가성을 가진 ‘뇌물’에 가까웠다. 513년, 무령왕이 게이타이에게 오경박사 단양이를 파견하면서 보낸 별도의 서한에서 기문의 땅(남원·임실 일대)을 얻는 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황국사관의 태도에서 극도로 윤색된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마치 왜국 군주에게 “반파(대가야)가 우리에게 빼앗았던 기문을, 조칙을 반포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이 문구의 합리적인 알맹이는 결국 대가야를 따돌려 백제와 대가야 사이의 각축장이었던 섬진강 일대를 꼭 독차지하려는 백제의 왜국 세력 끌어들이기 시도였다고 할 것이다. 일본과의 교통로이기도 한 섬진강을 독차지하려는 행동이 대가야와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을 예견한 무령왕은 왜국 병사의 지원을 원했던 것이다.

백제의 소망대로 515년에 왜국의 모노노베노 무라지(物部連)라는 귀족이 5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대사(하동 일대)에 진출했는데, 왜국 군인의 옷까지도 다 빼앗은 대가야 군대에 완패를 당하고 백제로 겨우 도망가고 말았다. 510년대 말에 이룬 섬진강 영역의 영토화는 결국 왜국의 지원에 의존했다기보다는 백제가 자력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동 일대에서 대가야 군대와 왜국 병사의 싸움을 유도한 백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오경박사인 중국인 고안무(高安茂) 등 전문가 파견을 계속해온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전례 없을 정도로 빨리 발전됐지만, 대가야와 왜국은 일시적으로 적대자가 됐다.

가야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나선 신라

523년 무령왕이 죽었을 때 그의 목관을 일본열도산 금송(金松)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백제와 게이타이 시대 왜국 사이의 친선은 특별했다. 그만큼 대가야의 고립도 심화됐다. 그 고립을 돌파하려는 대가야는 522년 신라 왕실에 청혼해 진골 귀족인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왕비로 얻게 됐다. 아마도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은 그렇게 해서 백제·왜국과의 대립에서 신라의 군사력을 이용하는 일종의 ‘이이제이’ 전략을 구상했던 모양이다.

» 가야 시대의 창. 돌출된 부분으로 달리는 적의 기병을 찔러 떨어뜨린다.

그러나 팽창해가는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의 신라는 대가야와 같은 소국에 이용당할 만큼 만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다소 윤색됐으나 진실의 알맹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 귀족의 딸이 대가야 왕비가 됐을 때 100여 명의 신라 관료·궁녀들이 신라 관복을 입고 가야의 여러 소국에 파견됨으로써 신흥 율령 국가로서 위세를 과시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리사등’(阿利斯等)이라는 칭호의 탁순국 군주가, 5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된 신라 관복을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신라 관인들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키자 신라가 당장에 이를 핑계 삼아 대가야와의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탁기탄 등 탁순의 북쪽 국경에 있는 여러 고을들을 공략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의 편년을 따르자면, 이 일은 529년(게이타이 천황의 23년)에 일어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확인되는 532년의 신라의 가락국(김해) 병합의 전주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백제와 왜국의 연합에 대한 일종의 ‘견제세력’으로 보였던 신라가 ‘침략자’로 돌변하자 4세기 이후 줄곧 왜인들을 상대해온 탁순국의 아리사등인 기능말다(己能末多)는 아라가야에 가 있던 오미(近江·오늘날 시가현) 지방 출신의 왜국 귀족 오미노 게누 오미(近江毛野臣)에게 부탁해 신라의 압박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 실력에 자신이 생겼던 신라는, 탁순에서 진을 치고 자리를 잡은 오미노 게누 오미에게 협상 자격이 없는 하급 관료만을 보내는 등 시간을 계속 끌다가 졸지에 3천 명의 대군을 이끄는 이사부 장군을 보내 군사적 압박의 순위를 높였다. 오미노 게누 오미의 작은 왜인 부대와 이사부의 대군은 다다라(多多羅·부산 다대포)에서 대치했는데, 왜군은 신라군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약탈만 일삼은데다 게이타이 천황 말년 왜국에서 일어난 정변 등으로 왜국에 추가 병력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약탈만 일삼다 철수해버린 왜 지원병

결국 왜군의 약탈에 지친 친백제 계통의 탁순국 귀족들이 백제 군대를 ‘해결사’로 부르고, 오미노 게누 오미 부대가 백제군에 밀려 철수해버렸다. 또 친신라계 지배층이 신라군을 환영해 대부분의 탁순국 영토는 신라에 먹히고 말았다. 물론 백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탁순 탈환’을 차후 하나의 전략적 과제로 삼기에 이르렀다. 529∼543년에 해당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거해 오늘날 마산∼창원 지역인 탁순국 말년의 역사를 복원하자면 대략 위와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뛰어난 군주 성왕(재위 523∼554) 시대의 백제와 법흥왕 시대의 신라, 그리고 이뇌왕의 대가야와 말년의 게이타이 시절 왜국 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각축 끝에 전략적 요충지인 이 땅의 대부분은 신라에 넘어갔다.

게이타이 말년에 모종의 정변에 휘말려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왜국은 긴메이(欽明·재위 539∼571) 천황이 집권해서야 어느 정도의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일본서기>를 한국인의 ‘혐오 문서’로 만들어버린 ‘임나일본부’와 같은 자극적 표현들은 바로 긴메이 집권기에 해당되는 기록에서 무더기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위에서 본 것처럼 왜국의 오랜 파트너인 탁순국 하나를 이사부의 군대로부터 구해내지도 못해 소규모 약탈에 그치고 만 왜국의 부대들이 가야 지역에 ‘부’(府)를 설치해 통치 행위를 벌였다는 것을 시대적 맥락상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임나일본부’라는 표현은 근원적으로 황국사관에 의한 후대의 윤색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이 줄줄이 나오는 <일본서기>의 기록들은 주로 백제 계통의 자료들이고, 그 자료에서 가상의 ‘일본부’와 관련된 흥미로운 부분들이 나온다. 예컨대 일본부의 지리적 위치가 아라가야(안라국, 즉 함안)로 돼 있지만, 일본부의 고급 관료들을 일본부에 파견하거나 일본부의 ‘집사’들을 회의에 소집하거나 각종 이유(‘신라와의 내통’ 등)로 힐책하는 주체는 계속 백제의 성왕으로 돼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인용된 백제 성왕의 한 국서에는 그가 일본부의 초기 수장 격인 인지미(印支彌)를 직접 가야 지역에 파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지미라는 인물이 왜인 호족 계통의 백제 관료로 보이고, 인지미에 이어 백제에 의해 일본부에 파견된, 나라현 다카이치군 출신으로 추정되는 고세노 오미(許勢臣)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음에 백제에 의해 아라가야에 보내져 아라가야의 무역·외교기관에서 직무를 보게 된 왜인 출신들은 오래지 않아 백제의 국익보다 아라가야 등 가야 세력의 이해관계를 챙겨 도리어 성왕의 분노를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즉, 그들은 왜국이 가야를 지배하라고 보낸 ‘식민지 관리’도 아니고 백제만을 위하는 정통 백제 관인도 아닌, 유동적인 일본열도산 ‘회색인’이었을 것이다.

왜국 호족들이 아라가야 독립 위해 활동

인지미나 고세노 오미는 그나마 백제에 의해 파견됐다는 흔적이라도 있지만, 일본부의 다른 책임자로 거론되는 이쿠와노 오미(的臣)나 가와치노 아타에(河內直), 기비노 오미(吉備臣) 등은 아라가야에서 오래 살아 실제로 아라가야의 신하가 된 나라현·오카야마현 출신의 호족들이었던 것 같다. 아라가야의 국익에 따라 신라와 적극적 외교를 펼친 이 왜인 호족들의 ‘송환’을 백제가 왜국에 계속 요구해도 별다른 효용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는 이들이 이미 아라가야를 위해 움직이는 일종의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듯하다. 좌로 마도(佐魯 麻都) 등 백제와 특별히 관계가 나빴던 일본부 하급자들은 왜인과 한인(韓人)의 혼혈로 가야 지역에서 태어난 6세기의 ‘다문화 가정’ 출신들이었다.

540년대 말 아라가야의 외교부쯤 됐던 일본부의 활약, 즉 신라와 백제, 왜국을 상대로 하는 등거리 외교에도 결국 북부 가야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각축은 신라의 승리(562년)로 귀결됐다. 하지만 고세, 이쿠와, 가아치, 기비 등 내로라하는 왜국 호족 출신들이 아라가야의 땅에서 아라가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는 사실은 우리로서 기억할 만하다. 왜인과의 관계를 빼면 과연 가야의 제대로 된 정치·외교사를 쓸 수 있겠는가.

통일된 고대 왕국을 이루지 못해 소국 연합체로 남은 가야는 5∼6세기 한반도 남부의 약체였고, 그만큼 강자인 신라·백제의 위세에 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힘이 센 가까운 이웃의 위세에 눌린 만큼 먼 이웃인 왜국과의 관계 관리에 힘을 쏟았고, 많은 왜국 호족들을 영입해 540∼550년대에 그들을 통해 아라가야가 중심이 돼 외교적 맹활약을 펼쳤다. 이 맹활약을 펼친 아라가야의 ‘대왜 관계 전담 부서’가 나중에 <일본서기>에서 일본부로 윤색됐지만, 과연 1550년 전 오늘날의 함안군에서 왜국 출신들이 여러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까지 애써 부정하거나 무시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가야 역사의 뛰어난 국제성은 오히려 자랑거리가 돼야 하지 않는가.

참고 문헌

1. <가야연맹사> 감태식, 일조각, 1993, 114∼251쪽

2.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엮음, 혜안, 2001, 339∼401쪽

3.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박천수, 사회평론, 2007, 149∼249쪽

4. <안라국사> 남재우, 혜안, 2003, 258∼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