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숫자로 보는 우리 민족의 삶-‘수는 그 전부다

chamsesang21 2009. 6. 4. 21:14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 오후 04:08

수리數理와 문리文理 그리고 사리事理     


한자의 수數는 워낙 ‘삭’이라고 읽는데, 참 묘하게도 사람 머리칼이 산발散髮한 것을 의미했다. 그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아서‘삭삭數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한 가닥 한 가닥, 또박 또박 세보고 싶었다. 그래서 수數는 ‘셈할 수’, ‘숫자 수’로 읽게 되었다. 계산計算과 같은 뜻의 계수計數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물론 수를 센다는 뜻의 산수算數란 말도 더불어서 만들어졌다. 계수하고 또 산수하다 보니, 뭣인가를 따지고 캐고 하는 게 되어서 수數는 마침내 필연을 의미하게 되고 일정한 법칙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수曆數란 말도 생겼는데, 이는 운명이며 운수運數를 뜻하는 말이다. 이래서 수리數理는 문리, 곧 문물文物의 이치와 짝을 짓게 되고 드디어는 사물이며 사건이며 사실의 이치나 이법을 의미하는 사리事理와 동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보는 것만으로도 수가 세상과 문물과 인생의 이법이요 로고스란 것을 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수리는 곧 사리다. 수는 수학 시간에만 큰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수직으로는 하늘과 지상과 지중의 삼계로 나뉘는가 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은 삼재三才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횡적으로 우주 공간은 사방 아니면 오방으로 구획되어 있다.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결정적으로 수다. 24시의 하루는 다시 또 삼시三時삼 때로 구분되어 있다. 우주 구성도 시간도 하나같이 수로 잡혀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도 그 육신이 곧 수다. 사대육신四大六身이 곧 우리들 몸통이고 그것은 또 사지四肢를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사대四大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요소인데, 그런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기는 우주나 사람이나 다를 것 없는 셈이다. 그런 네 가지 요소로 우리들 인간의 육신六身, 곧 머리, 몸통, 각각 둘씩의 팔과 다리가 이루어져 있다고들 믿어 왔다. 뿐만 아니다. 인체를 두고는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했으니, 그래서도 인간 몸뚱이는 숫자다.
수의 이와 같은 엄청난, 무시무시한 속성은 한국인의 세계관이며 인생관에도 곧잘 나타나 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사주팔자四柱八字’를 말하고 또 그것에 그들의 삶의 중요한 대목을 맡겨 왔다. 사주팔자는 한국인의 인생관에서 사통팔달四通八達하고 있다. 사주팔자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사전에는‘사주四柱의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라고 풀이되어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어느 사람이 태어난 해, 달, 날 그리고 시時 등의 네 가지가 사주지만, 그 하나마다 갑자甲子, 을축乙丑, 병인丙寅과 같이 두 자 씩이 붙으면 모두 팔자가 된다. 이게 소위 사주팔자인데 그 4와 8이 사람의 운수를 매긴다고 한국인은 생각해 왔다. 그래서 산통算筒이 깨지면 팔자가 못 쓰게 된 것이다.
결국, 4와 8 사이에 우리들 한국인의 숙명이 맺혀 있었던 셈이다. 한데 이건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혼인할 때, 맞추어 보게 되는 소위 궁합은 전적으로 이 사주팔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일상 대화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들, 예컨대‘무슨 사주가 그래?’또는‘아이고 내 팔자야!’등에서 4와 8은 운수를 정하는 숫자고 운명을 정하는 숫자다.

세이레, 그 엄청난 유래
    
그러기에 한국 신화에서 이미 숫자가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더러 국조國祖, 곧 나라의 시조라고도 일컬어져 있는 단군의 신화에서 수는 엄청 큰 구실을 맡아내고 있다. 그 천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지상 세계로 하강하되, ‘삼위三危 태백太白’을 내려다보고는 천부인天符印, 삼개三個를 가지고 삼천三千명의 무리를 이끌고는 태백 산정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과 석 줄의 글 속에 3이 세 번씩이나 두드러져 있다. 숫자 3은 그토록 특별나게 기세를 돋우고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숫자 3을 더불어서 이 인간 세계에 내려 와서는 360 가지 인간사人間事를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한데 숫자는 이로 그치지 않는다. 위에서 들어 보인 그 세 번의 3 말고도 1이 세 번, 3과 20과 37과 100과 50과 1500과 1908이 각각 한번씩, 내비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단군신화는 숫자 없이는 문맥이 끊기고 말게 되어 있다. 단군신화는 수의 신화라고 해도 크게 과장될 것은 없다. 그런데 3이 한 번 더 고개를 추켜세우고 있는 대목이 단군신화에는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고자 신에게 빌었는데, 곰은 신이 시킨 대로 쑥과 마늘만 먹고는 37일 동안, 바위 굴속에서 몸을 삼가서는 사람이 되었는데 호랑이는 그렇게 금기를 지키지 않아서 끝내 사람 되기를 실패하고 만다.
이 때, 37일이란 모두 스무 하루이되, 이레를 단위로 삼아서 그걸 세 번 지나게 되는 날짜다. 그러니까 7×3이니까 여기에서도 3이 문제될 수 있다. 한데 37일을‘세이레’라고 읽어보자. 그러면 얼핏 어떤 것이 연상될까? 그건 다름 아니다. 갓난 애기를 위해서 치르게 되어있는, 일종의 ‘젖먹이의 통과의례’인, 바로 그 세이레다. 여기서 통과의례란 말은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 치르게 되어 있는 일종의 종교 행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웅녀가 세이레 치르고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 난 것과 마찬가지로 젖먹이는 세이레 치르면서 차츰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곰인 웅녀가 사람이 되었다는 데서도 우리는 역시 일종의 통과의례의 자취를 살펴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삼천 년도 더 이전, 우리의 상고대의 또 상고대 시대에 ‘세이레’라는 통과의례가 치러졌듯이 오늘날에도 젖먹이들을 위한 세이레의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도 전통도 숫자려니
    
온 인류를 통틀어서 볼 때, 1, 3, 5, 7, 9 등의 홀수는 신성하고 거룩한 숫자다. 그건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전통적인 명절이 으레 홀수 날짜에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월 1일의 설, 3월 3일의 삼질, 5월 5일의 단오, 7월 7일의 칠석, 9월 9일의 중구절 등이 그것인데, 그 중에서도 가령, 단오 때면 여인네가 널뛰고 그네 타고 하면서 축제를 화려하게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서 2를 비롯한 짝수는 세속적인 숫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점은 단군신화와 오늘의 한국의 ‘유아 통과의례’에서나 추호도 다를 바 없다. 뿐만 아니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신에게서 백날 동안 햇빛 보지 말고 굴 속에서 근신하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도 받고 있다. 그러나 웅녀는 세이레를 근신하고는 소원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백날과 세이레의 의미며 구실이 겹쳐 있는 셈이 된다. 그것은 오늘날 갓 태어난 젖먹이들을 위한 통과의례가 세이레 거쳐서 드디어 백날에 가서 마감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근현대의 세이레며 백날이 단군시대에 이미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을 헤아리게 해 주고 있다. 37과 100이 한국의 역사며 생활습관 속에서 수천 년 두고, 두고 한국인의 생애에서 큰 구실을 맡아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떨까? 백을 우리는‘온’이라고 일러 왔다. 전부고 전체고 완전한 것이 온이라면 어떨까 싶다. 백겁百劫, 백계百計, 백과百科 등에서 백은 모두 온이다. 완전이고 전체다. 그런 한편 3의 위세는 더한층 등등하다. 삼강오륜의 삼강 말고도 삼계三界가 있고 삼간 집이 있고 삼관왕이 있고 삼권이 있고 삼군三軍이 있다. 문화와 사회와 인생의 요목마다 3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무리지어서 길을 걸어도 삼삼오오다.
애들도 미성년도 그건 잘 알고 있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단 세 번’이다. 대학입시도 삼수까진 용납된다. 한 시대 전 같으면 뒷간 곧 변소에 들어 갈 때도‘탁탁탁!’, 침을 세 번 뱉었다. 길가다가 동전 주웠을 때도‘하늘 보고 땅보고 ...’ 하면서 땅에다 대고 세 번 침을 내뱉었다. 그걸로 그 돈은 새 임자를 만난 게 된다. 그러니 가위바위보, 단 세 번 하는 꼬마들에게서나 세이레를 지켜낸 웅녀에게서나 3은 절대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것이다. 거기 역사의 맥줄이 있고 전통의 연줄이 있다. 그러니 계산하다는 뜻의 ‘세다’와 생각한다는 뜻의 ‘헤다’가 서로 맞통하고 있는 것에 새삼 유념하게 된다.‘헤다’는 ‘헤쳐 나가다’와 통하는 말이기에 한국인에게 수는 사고며 사색이다. 궁지나 어려운 고비를 헤쳐 나가는 방편이요 길이다.

▶글·김열규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사진·원광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