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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축제, 민속놀이를 통해 大同을 배우다

chamsesang21 2009. 2. 24. 19:53

월간문화재사랑
2009-02-05 오후 03:04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으로 일컬어 온 인간 본성에 대해 일찍이 호이징거(J.Huizinga)는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으레 ‘각박함’과 ‘개인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 마을공동체라는 공간 속에서 연행되는 새해맞이 축제, 그 구심점인 대동놀이를 통해 각박함을 떨쳐버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된 대동의식을 일깨워 보자. 비로소 인간이 유희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해의 시작 정월, 놀이하는 비일상의 시간
전통사회에서 축제는 마을에서 모시는 신에 대한 제사와 대동놀이, 그리고 다양한 민속예술로 구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대동놀이는 상당수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진다. 대보름은 일 년 중에서 달이 크게 차올라 달빛이 가장 밝은 날이다. 달이 둥글게 차고지는 주기는 규칙적이며 또한 정확하기 때문에 보름 중에서도 농사를 짓기 전에 맞이하는 첫 번째 滿月만월, 정월 대보름의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 공동체 신에 대한 제의가 이 무렵에 집중되어 있고, 한해의 풍흉과 모듬살이를 점치는 놀이와 행위 또한 이 날 집중적으로 행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동적이고 집단적인 대동놀이도 정월 대보름에 집중되어 마을공동체의 새해맞이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여성들은 휘영청 둥근 달빛을 받으며, 여럿 어울려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강강술래를 즐겼고, 두 패로 나뉘어서 노래를 부르며 놋다리밟기를 했다. 한편 고싸움·동채싸움·나무쇠싸움·농기싸움·횃불싸움 등 남성들의 놀이는 명칭에서부터 싸움 형식의 겨루기 놀이가 주종을 이룬다. 이름에서처럼 놀이의 방식이 한층 격렬하고 규모도 거대한 ‘싸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놀이감 부터 거대하고 복잡하다. 동채·고·나무쇠 등 거대한 놀이감이 동원되는가 하면, 각종 풍물과 깃발 등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 풍물을 구입·보존하고 동채와 같은 거대한 놀이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미 마을 단위의 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적인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단놀이는 그 양식상 오랫동안의 준비과정과 소정의 경비를 필요로 하며, 대규모의 일원이 일시에 동원되어야 하므로 수시로 판을 벌일 수는 없었다. 정월 대보름 축제에서는 중심을 이루는 놀이와 함께 다채로운 앞놀이와 뒤풀이가 배치된다. 이로서 중심적 연행은 한층 풍요로워지고, 지역민들은 보다 깊게 축제에 빠져들 수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의 경우 중심적 연행인 두 편싸움놀이의 앞놀이로서 서낭싸움과 진잡이를 한다. 이들 놀이 외에도 놀이기구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 지신밟기, 놀이기구의 제작과 운반과정, 승리를 축하하는 길놀이 등은 모두 중심적 놀이를 보조하는 놀이적 장치들이다.
모둠살이의 믿음과 섬김 사이에 대동놀이가 있었다.
세시풍속과 관련된 어른들의 놀이는 사실상 마을 전체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풍농기원의 제의적 성격을 지닌 놀이는 이러한 성격이 더 짙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마을 사람들 또는 고을차원에서 전체가 함께 참여하는 가장 대표적인 놀이는 역시 줄다리기이다.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 사이에 겨루기를 통해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성행위 형식의 주술성을 지니고 있다. 각 편의 숫줄과 암줄의 생긴 모양이나 그 결합과정과 줄을 당기는 과정이 남녀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고 있어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모의적 類유 感감 呪術주술의 성행위에 입각한 놀이이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때 관권에 의해 줄다리기를 하지 못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여겨 감시를 피해 밤에 몰래 놀기까지 한 줄다리기였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구경하는 놀이는 놀이자체의 집단적 성격 과 함께 공동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공동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 이를테면 지신밟기를 해야 지신을 누르고 잡귀를 몰아내어 마을이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든가, 줄다리기를 해야 새해의 흉풍을 점치고 마을의 질병과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제의적 목적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이웃끼리 협동하는 가운데 놀이판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특히 줄다리기는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신에 대한 제사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호남의 외줄다리기와 쌍줄다리기는 대개 제사가 거행되는 당일 제사에 앞서서 행해진다. 줄다리기를 하는 곳에서는 줄다리기와 제사가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줄 만들기, 줄굿, 마을돌기, 줄다리기, 제사, 뒤풀이 등이 하루 동안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이 매우 유기적이다. 마을을 단위로 행해지는 쌍줄다리기에서는 대개 줄을 당기는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줄을 메고 동신을 방문하는 과정이 있다. 사람들은 동신에게 줄다리기가 사고 없이 치러지길 기원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줄다리기 전후에 줄을 메고 동제당으로 가서, 줄을 똬리 모양으로 틀어놓은 뒤 서낭에게 고한다. 이 과정의 전, 혹은 후에 앞놀이가 행해진다. 이 뿐만 아니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 줄의 처리과정에서도 공동체 신이 좌정하고 계신 곳으로 여겨지는 당산에 줄을 모셔놓고 일 년 내내 당산과 함께 섬긴다. 경북 포항시 모포리에서는 아예 줄을 골매기의 신체로 인식하고 洞동舍사에 영구보존하여 섬기고 있다. 이 외에도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토막 내거나 통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줄을 지붕 위에 얹어 놓으면 집안에 액이 들어오지 않는다.’, ‘논밭에 줄을 넣으면 곡식이 잘 된다.’, ‘불임녀가 달여 먹으면 아기를 갖는다.’, 배위에 싣고 바다에 나가면 豊漁풍어진다.‘ 등의 언술이 그것이다. 모두 줄다리기 줄이 지니고 있는 除제厄액 내지는 액을 막기 위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줄다리기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제액을 통한 안과태평을 기원하고 있다면 줄다리기로 呪力주력을 확보한 줄은 각 집안 단위의 제액과 안과태평을 보증하는 것이다.

험난한 세월과도 싸워야 했던 놀이사의 단면
조선 말엽에서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민속놀이는 규제를 받기 시작했다. 石戰석전이라든가, 줄다리기 등 편싸움과 같은 지역 단위의 대규모 겨루기놀이는 법령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놀이가 너무 격렬한 나머지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역단위, 마을단위에서 행해진 크고 작은 대동놀이가 지니고 있는 협동심과 애향심 등을 통해 힘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고자 한 의도가 숨어있다. 관아의 금령에도 굽히지 않고 계속되던 편싸움은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이 자행되면서부터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다.《梅(매泉천野야錄록 ; 石석戰전禁止금지條조》에 의하면, 일제는 대동놀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총포를 쏘기까지 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비상시기를 선포하고 민중집회를 금지시키면서 노골적으로 편싸움 뿐만 아니라 횃불싸움·지신밟기 등 대규모 집단 놀이 등의 공동체의식을 드높이며 尙武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놀이들을 多衆다중集會집회의 금지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안동지역에서는 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인들의 관심 속에서 소규모의 차전(동채싸움)이 행해졌다. 이 싸움이 워낙 격렬하게 진행된 나머지 투석전(돌던지기)으로까지 이어져 서로 던진 돌에 맞아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를 이유로 차전의 연행을 엄금하였다. 이에 지역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수차례에 걸쳐 차전놀이의 연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일제는 1936년에 차전놀이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하는 조건하에 놀이를 허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한 당시 차전놀이는 놀이기구인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꾼들간에 싸움이 벌어져 몇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고 막을 내려야만 했다. 본격적인 차전은 중단되었지만 약식 동채를 이용하여 1940년대 초반까지 소규모의 차전이 행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차전의 전승은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1966년이 되어서야 몇몇 지역민에 의해 차전이 복원되었고,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제2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례처럼 수많은 대동놀이가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처럼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은 대동 놀이를 통해서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놀이를 통해 ‘너와 나’ 아닌 ‘우리’, 大同대동을 맛보다
겨루기 형식의 대동놀이는 준비과정부터 놀이를 마칠 때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이 기간 동안 때로는 고함으로 목이 쉬고, 때로는 병이 날 정도로 열성을 보이면서 차츰 서로 간에 협동심과 단결력이 자연스럽게 다져진다. 때로는 싸움이 격하여 팔이 부러지는 등 부상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되고 위험천만인 대동놀이가 성행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더욱이 이긴 편이나 패한 편 모두가 승부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드라마틱한 놀이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데에는 그 무엇이 있다.
줄다리기나 차전놀이, 고싸움놀이, 쇠머리대기 등의 놀이는 지연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진행하는 편싸움이다. 놀이의 구성은 대체로 동부·서부, 윗마을·아랫마을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편은 마을 내 또는 고을 전체의 수많은 마을들로 꾸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각 편은 상호협의를 통해서 자기편의 수많은 지연공동체를 조직적으로 엮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를 바탕으로 준비에서부터 싸움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의 역할을 분담하여 진행한다. 또한 각 편 놀이꾼의 편성은 개인의 능력에 맞게 적절하게 이루어진다. 이들은 거듭되는 경험을 통해서 단결력을 키우며 조직적으로 상대편과 맞선다. 대동놀이가 축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참여주체의 개방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줄다리기에서 여성편의 압도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전라도 지역의 외줄다리기는 남성중심의 일상세계가 전도되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녀가 일체가 되어 진행되는 쌍줄다리기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줄다리기의 경우, 갓 시집온 새댁이 줄다리기에 참여하여 어떤 남정네의 사타구니 밑으로 손을 넣고 줄을 잡고 당겼는데, 알고 보니 시아버지더라는 에피소드는 ‘함께 줄을 당긴다’는 것 이외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줄다리기의 대동 지향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줄다리기를 비롯한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는 성적, 사회적 차별을 최소화하고 대동을 극대화하는 축제적 장치이기도 했다. 편싸움에서 강제된 구별은 우리 편과 다른 편 뿐 이다. 우리 축제는 물론 세계 각 문화의 축제에서 중심적 놀이로서 편싸움이 즐겨 채택되는 것은, 경쟁이라는 동기부여의 모티프를 갖고 있으면서도 차별과 구별을 최소화함으로써 폭넓은 참여를 통한 축제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 편은 오직 놀이에 함께 참여한다는 동질적 평등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비로소 ‘너와 나’ 아닌 ‘우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편싸움 놀이를 비롯한 대동놀이 승패의 명암이 엇갈린다 하더라도 모두가 유희인Homo Ludens으로서 동질감을 실현시키는 대동 그 자체인 것이다.

▶ 글 ㅣ 황경순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사진 ㅣ 국립문화재연구소, 평택농악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