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를 담은 담
한국의 담은 돌쌓기가 특이하다. 삐뚤삐뚤하고 불규칙하며 비정형적이다. 제멋대로 쌓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표준화 혹은 동일성을 싫어한다는 뜻인데, 산업기술이 발전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자조적인 의견도 있으나 직지심경이나 신기전 같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나 조선시대 때 우리의 산업기술은 결코 낙후하지 않았다. 돌을 동일한 크기로 자르거나 똑같은 벽돌을 찍어내서 가지런히 쌓은 기술은 그다지 첨단기술이 아니다. 맘만 먹으면 일도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데, 한 마디로 우리의 자연관이 배어 있는 현상이다. 건축에서 조적부재는 자연재료의 물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담의 돌쌓기에는 일차적으로 자연에 대한, 궁극적으로는 물질에 대한 기본 인식과 태도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노장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이 교훈은 억지로 하는 큰 공교로움은 서툰 것과 같다고 가르친다. 돌덩어리 하나를 다루더라도 가능하면 큰 공교로움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겠다는 의도이다. 물질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게 되는데 돌쌓기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부재로 쌓으면 높이 올라가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십 미터만 올라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가 막상 십 미터를 쌓으면 슬그머니 두 배를 쌓고 싶어진다. 이런 식으로 물질의 노예가 된다. 한국의 돌쌓기는 이를 경계해서 처음부터 그 사이클에 들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 높은 담이 없는 이유이다. 한국의 돌쌓기는 물욕 같은 심리적, 도덕적 문제에서만 위대한 것이 아니다. 삐뚤삐뚤한 돌쌓기는 과학적으로도 뛰어나다.
성북동 서울성곽, 근대화 과정에서 담이 헐려나가면서 주택가와 합해져버렸다.
지금은 주차장 담벼락처럼 되어 있는 곳도 있다. 할머니 두 분이 말을 주고받는다. “나는 저 담 밑에 주차하면 위험할 것 같아. 돌멩이가 떨어져서 차가 다칠 것 같아.” 그렇지 않다. 삐뚤삐뚤한 돌쌓기에서 돌멩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마찰력이라는 역학 작용 때문이다.
삐뚤삐뚤할수록 마찰력은 커진다. 부재들 사이에서 나오는 관계의 한 형식이다. 관계 맺기가 너무 끈끈하다 못해 새로운 힘의 작용까지 만들어낸 셈이다. 한국다운 주관적 정의 문화가 돌쌓기에 반영된 것이다. 서양의 돌 축조술에는 마찰력을 이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서양에서는 이미 로마시대부터 모든 조적 부재를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쌓은 오푸스 이소도뭄이라는 축조술이 완성되었다. 이후 서양에서 관심 있는 역학 작용은 압축력과 인장력에 집중되었으며 동일한 부재는 시멘트라는 강력 접착제를 발라 붙였다. 개별 요소 고유의 형상과 크기,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개체들이 서로 만나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관계의 종류에는 무관심했다. 총체적 가치와 강령이 먼저 정해지면 개별 돌멩이는 이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인공적으로 다듬을수록 미덕이었다. 한국의 돌쌓기는 이것의 반대로 보면 된다. 마찰력을 조적술에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개별 돌멩이의 개성을 존중할뿐더러 다양한 개성들이 만나일어나는 관계의 종류에 관심이 많아서 이를 즐기고 활용했다는 뜻이다. 이는 “필부라도 함부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한 유교의 핵심 가르침인 ‘인仁’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돌쌓기에는 불교의 자연사상, 노장의 물욕 자제의 가르침, 유교의 인의 가르침이 하나로 합해져 녹아있는 것이 된다.
건물 역할에 따라 문양을 달리했던 담
한국의 담은 건물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산사에서는 굳이 영역을 가를 이유가 적은 대신 각 전각들의 기단을 담 형식으로 꾸민다. 낮은 기단은 기단에 머물지만 기단이 높아지면 담과 같아진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밑에서 떠받들어 전각에 요구되는 종교적 권위를 실어준다. 돌쌓기는 물론 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삐뚤삐뚤한 막쌓기이다. 형식화를 가해서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 그 범위는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궁궐의 담은 영역 나누기가 엄격하다. 보안과 방어 같은 기능적 역할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법도와 예절에 따른 위계와 영역 나누기가 핵심 관건이었다. 돌은 가지런하게 쌓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계속 무엇인가 장난을 친다. 행각을 넣어 문양효과를 노린다. 담만으로 심심하다고 느꼈는지, 벽을 올리고 창을 내고 서까래를 얹어 지붕을 덮는다. 기둥을 세우고 주초가 불쑥 튀어나온다. 요소가 많아지면 한국 특유의 어울림의 미학이 나온다. 구성효과가 나타난다. 궁궐 담은 모자이크를 보는 것 같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는 아예 담에 십장생이나 전서체 같은 문양을 새겨 꽃담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더 있다. 영역 나누기가 활발하니 바깥 면은 저쪽 영역에, 안쪽 면은 이쪽 영역에 속하게 된다. 담 한 장이 두 가지 다른 영역에 속하다보니 안쪽 면과 바깥쪽 면을 다르게 처리하게 된다. 표리부동이긴 한데, 상황에 따른 형식화 기능이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구중궁궐이니 지붕과 어울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공간 구조상 궁궐에서는 항상 수많은 지붕이 충돌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적당한 선에서 자르고 정리해주는 것이 담이다. 밑에서 단단하게 수평선을 그어 받쳐주면 그 위에서 지붕이 맘껏 활개 치며 논다. 와글와글 모여 떠들기도 하고 서로 손잡고 춤추기도 한다. 법도와 위계에 따라 엄격한 형식미를 내보이기도 하고 친자의 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부담 없이 하게 깔아준 멍석이 궁궐의 담이다.
담, 그 안에 담긴 은근의 미학
산성의 담은 구곡九曲 진다. 능선 따라 완만한 곡선을 이룬다. 마을에 쌓은 담도 그렇다. 직선이라도 직선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슬그머니 한 획 그어놓은 것처럼 은근하다. 곡선이면 더 곡선답다. 이유 없이 가르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은근하다. 나누고 자르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굵은 직선으로 세운 담과는 다른 차원이다. 담을 왜 세웠는지 묻는 차원이라면 한국 마을의 담을 보면 안 된다. 없는 것보다 낫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허허실실의 미학이다. 한국다운 정서의 최고봉이다. 푸른 보리밭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저 슬쩍 쌓아본 것일 뿐이고, 그래서 시비를 가릴 듯 따지지 말고 그저 그렇게 슬쩍 즐기면 되는 담, 이것이 한국의 마을에 쌓은 담이다. 재료도 다양하다. 돌부터 다양하다. 화강석, 짱돌, 벽돌 등등.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제멋대로 생긴 돌들을 다 모아서 잘도 쌓아낸다. 진흙을 척척 바르면 진흙은 접착제를 넘어서서 그 자신이 담의 재료가 된다. 기와를 파편 내서 쌓으면 말 그래도 와편 담이 된다. 나뭇가지를 쌓아도 담이 되고 대나무를 촘촘하게 쌓아도 담이 된다. 허리 높이로 돌담을 쌓고 그 뒤에 병풍처럼 대나무를 심어 놓으면 자연스러우면서도 격식을 잘 차린 묘한 담이 된다.
글·사진 |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부 교수 사진·담양시청, 송광사, 연합콘텐츠, 엔싸이버 포토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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