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문화 유산

물길에서 만난 문화재

chamsesang21 2010. 3. 23. 09:21

월간문화재사랑
2010-03-11 오전 10:34




호반의 도시를 감싸는 북한강

물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 유역면적이 2만 6천여㎢에 달하는 한강 물길이고 보면 주변에 산재한 문화재를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저 높이서 물길을 내려다보는 수많은 산성들, 물길을 품에 안고 자리한 선사시대 집 자리들과 절터. 그 모두를 일일이 만나 대면하기에는 지면도, 시간도 모두 턱없이 부족하다.

북한강 물길을 대표하는 도시, 춘천을 호반의 도시라 일컫는다. 근대에 들어 댐이 건설되며 만들어진 별칭이고 보면 차라리 북한강에 소양강과 홍천강 물길이 모이는 이곳을 물길의 도시라고도 부를 만하다. 물길에 둘러싸인 분지 곳곳에서 문화재를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물길 좌우의 너른 충적지대는 선사시대 유적의 보고이다. 북한강 물길 따라 점점이 널린 선사시대 유적 중 대표적인 곳이 신매리유적(사적 제489호)이다. 손으로 매만지면 기분 좋은 느낌이 들 정도 고운 흙이 차곡차곡 쌓인 땅은 신석기~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무덤이 밀집 분포된 중부지역 최대의 복합유적지임이 확인되면서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한강변의 풍광 좋은 금싸라기 땅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혀 지금도 민원의 단골대상이다. 현재 사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면적은 90,833㎡에 불과하지만 사실 신매리 일대뿐만 아니라 물길을 따라 사적 위, 아래, 물길이 닿는 춘천분지 전체가 선사시대 유적지다.

춘천분지와 소양강, 북한강 물길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분지 중앙에 볼록 솟은 봉의산 정상의 봉의산성鳳儀山城(강원도기념물 제26호)에 오르면 된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고려 이전,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능선의 가파른 지형을 이용한 입지조건 탓에 고려시대 거란과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에도 격전지였다. 다만 지세가 험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에는 좋았으나, 크기가 작고 식수원이 부족한 탓에 고종 40년(1253), 몽골의 4차 침입에서처럼 장기간 적의 포위는 감당하지 못하였다.

몽골의 침입에 춘천 주민들은 방어가 용이한 봉의산성에 들어가 항거하였다. 곧 식수가 부족해지자 소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가며 버티지만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갈증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자 성안의 군졸과 주민들은 항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몽골군 진영으로 돌진하였고, 끝내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순절하였다. 이스라엘에 항전의 성지 마사다가 있다면 춘천에는 봉의산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하다.

분지를 조금 벗어나 북한강에 합류하는 소양강을 따라 올라가면 동양 최대의 사력댐이었다는 소양댐이 있다. 그러나 기껏 소양댐 호반만 둘러보고 그냥 갈 수는 없다.



2010년도 2월에야 명승으로 지정된 청평사淸平寺 고려선원高麗禪園 ; 명승 제70호은 계곡,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절경에 혹한 나옹, 김시습, 이황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머물며 글을 남겼던 곳이다. 조선 초 쌍지雙池로 개축된 한국 전통 연못의 대표적인 조경시설인‘영지’를 비롯하여 청평사지(강원도 기념물 제55호)를 볼 수 있다. 소양댐이 건설되면서 마치 섬처럼 고립된 탓에 접근이 용이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소양댐 호반에서 배를 타고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원, 충청, 경기를 아우르는 남한강

강원·충북·경기 3도를 아우르는 남한강이다. 하천 유역에는 기름진 충적평야와 완만한 하안단구, 구릉지대가 펼쳐져있고 물길이 이어지지 않는 곳이 없으니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터전으로 적합한 곳이다. 태백 준령에서 솟아나온 남한강 물길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다 보면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를 지나칠 수 없다.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렀다는 어가를 비롯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다. 숱하게 반복되며 우리의 뇌리에 박힌 단종의 애달픈 이미지는 2000년, 어가를 복원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월군이 발굴조사 결과와 문헌 자료 등을 토대로 어가를 북향의 기와집 1채와 시종 등의 숙소인 초가 1채로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기와집은 대중이 간직한 단종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청령포로 쫓겨난 단종의 어가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단종애사’에서처럼 겨우 자기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퇴락한 초가여야만 했다. 결국 기와집으로 복원되긴 했지만 후손이 원하는 이미지에 갇혀버린 단종이 새삼 더 애달프다.

충주 탄금대彈琴臺(명승 제42호)는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명인 가야의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하여 이름 붙은 곳이다. 우륵이 망국의 한을 가야금으로 풀어내던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장군이 왜군과 맞서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하였다. 신립장군의 패전으로 곧바로 도성이 함락되고 조선이 패망 일보직전에 갔다는 점에서 새삼 공교롭다.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한반도의 배꼽 충주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에 섬강이 합쳐지는 곳이 원주 부론이다.

고려 때는 전국의 12조창 중 하나인 흥원창이 설치되었을 만큼 물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던 이곳에 법천사지法泉寺址(사적 제466호)가 있다. 창건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올라가지만 고려시대에 가장 크게 융성하였다. 국내 부도탑비 중 가장 아름답다는 지광국사 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 제59호)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다만 탑비 앞에 짝을 이뤄 세워졌던 지광국사 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국보 제101호)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역시 국내 부도탑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오사카로 빼돌렸던 것을 반환받아 지금은 경복궁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제자리를 벗어나 타지를 떠도는 것을 안타까워한 원주시민들의 반환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박살난 파편을 간신히 주워모아 지금의 상태로 복원해 놓았기 때문에 원주까지의 먼 여정을 견디기 어렵다. 문화재나 사람이나 집 떠나면 고생이다.


두 물길이 만나 하나되는 곳, 한강

북한에 있어 북한강이고, 남한에 있어 남한강이냐는 철부지 조카를 쳐다보며 그냥 웃고 말았지만 금강산에서 발원하였다는 북한강이고,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하였다는 남한강이고 보면 전혀 뜬금없는 애기는 아닌듯하다. 북한강과 남한강, 이 두 물길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곳이라 두물머리, 양수리兩水里다. 하나가 되어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질러 황해로 흘러드는 한강 하류부는 선사시대로부터 문화발달의 터전이 되어왔으며 삼국시대에는 뺏고 빼앗아야만 하는 요지였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함으로써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는 한강 물길을 터전으로 삼고 살던 사람들과 주변의 문화재에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줬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천년 땅속에 묻혀있던 신석기시대 유적이 이때 내린 비로 땅이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토기, 석기 등 유물이 발견되면서 처음 알려졌다. 한강변 넓은 충적대지에 형성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사적 제267호)은 이후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의 집터와 부속시설, 야외노지 등이 조사되었고, 한국 신석기시대 문화 연구에 한 획을 그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한강유역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 현재 유적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시관도 있다.

1994년, 서울시의 정도定都 600년 행사는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왔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1394년 서울로 도읍을 옮긴 지 600년이지만 이미 서울은 삼국시대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가기까지 무려 500년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수도 한성의 랜드마크가 바로 풍납토성風納土城(사적 제11호)이다. 한강변에 남아있는 백제 토축 성곽으로, 원래는 총연장 둘레 3,740m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 중에서 가장 넓은 단면은 남벽에서 57m나 되는 곳이 있고, 높이가 약 6.5m이다. 성안의 현재 표토는 홍수 등으로 원래보다 약 4m 정도 높아진 곳이 많아 당초는 성안에서의 성벽 높이가 10여m에 달하였고, 성 밖에서는 더욱 높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신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와 우물터에서 수백 점의 토기가 발굴되는 등 백제 궁성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 위치한 곳으로 확인됨으로써 한성 백제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는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양에서 강원, 충청지방 구석구석까지 온갖 물품과 사람을 실어 날라주는 물길이지만 바로 코앞 물길 건너편을 왕래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물길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가 새삼스레 고맙다.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 물길을 건너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과 강원도와 경상도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가 아직도 남아있다. 전곶교箭串橋(사적 제160호), 일명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으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성종 14년(1483)에야 완성되었다.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 라고도 불렸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1972년에 다시 고쳐지었는데, 이 때 원래보다 넓어진 하천 폭에 맞추기 위해 다리 동측에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형을 다소 잃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한강의 큰 물길은 서울을 지나 곧 바다로 흘러든다. 그 길목에 권율權慄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고양 행주산성幸州山城(사적 제56호)이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서해안과 연결된 물길의 거점이자 남북교통의 요충지로 중시되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이 만일 선조 26년(1593) 당시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면 임진왜란의 양상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왜군과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성 안의 부녀자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병사들에게 날라주었다는 데서‘행주치마’가 유래하였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현재 성내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통해 건립한 권율장군을 모신 충장사忠莊祠와 전시관 등이 있다.   


글·사진 | 박성희 한강문화재연구원 유적조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