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시전행랑 건설과 변화
1392년 조선이 개국되고 우선적으로 추진한 것이 천도遷都이다. 여러 논의 끝에 최종 한양으로 천도가 결정되었고 1394년 9월 도읍 건설에 착수하였다. 종묘, 사직, 궁궐, 조시朝市 및 도로의 터를 정하고, 도성 건설 제도인 <주례고공기>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즉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앞에 조정 뒤에 시장’이라는 원칙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였다. 다만, 경복궁의 뒤쪽 공간이 좁아 시장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종로 등의 길가에 저자를 열어 상품을 진열하고 장사하였으며, 지금의 종로사거리 일대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운집하여 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의미에서 ‘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런데 사람과 물화가 많이 모이다보니 속이고 훔치는 일이 많았고 물건 값이 올라가는 원인이 되었다. 마침내 태종12년(1412)부터 종로를 시작으로 태종14년까지 창덕궁 및 남대문에 이르는 도로 양측 변으로 행랑을 건설하였다. 행랑은 대부분 시전으로 사용하였고 일부는 관청에서 사용하는 조방朝房으로도 사용하였는데, 시전행랑은 상인들에게 임대해주고 세금을 받았으며 하나의 점포에서는 하나의 물건만 파는 ‘일물일전一物一廛’을 원칙으로 하였다. 시전은 왕실 및 관청은 물론 한양도성 백성들의 쌀과 잡곡 등 먹을거리, 면포·비단 등의 입을거리, 땔감 등 생활필수품 그리고 중국과의 공물貢物까지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한양도성의 내부 시설들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 주요 관청 그리고 시전행랑도 이때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 불에 타고 말았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시전행랑은 바로 복구가 되지 못하고 점차적으로 복구되어 영조30년(1750)경에 이르러서 다시 도성의 중심시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충무로, 명동 일대의 일본인 중심 상점가와 소공동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청나라 중심의 상점가에 대항하여 조선인의 중심 상점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근대화의 변화 속에서 점차적으로 그 모습은 하나씩 사라졌고 이제는 시전행랑 뒷길인 피맛길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드러난 600년 역사의 흔적들
종로 대로의 북측지역인 종로구 청진동 166번지 및 종로1가 25번지 일원의 ‘청진6지구 도심재개발사업’은 지하 7층, 지상 20층의 건물을 신축하는 공사였다. 공사에 앞서 기존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옛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확인되어 2004년부터 명지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문화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곳은 피맛길을 경계로 북측은 청진동, 남측은 종로1가로 행정구역이 구획되는 곳이다. 조사 결과, 지표에서 약 4.6m 깊이까지 최근의 집터에서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조선시대 후기, 중기 및 초기까지의 다양한 건물터들이 층층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땅속은 크게 6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었는데 대부분의 건물터들은 파괴된 상태였으나, 일부 온전한 건물터도 노출되었다.
피맛길 북측지역의 가장 상부의 제1문화층은 지표에서 약 60cm 내외 깊이까지로 일제강점기에서 재개발 사업 직전까지 사용했던 층이다. 이 층에서는 각종의 폐기물과 1930년 전후에 건립된 건물터에서 초석, 기단석 및 온돌시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음식점터가 확인되었고, 어떤 건물터에서는 나무로 불을 지피던 구들에서 연탄, 기름보일러로 변화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서울지역 난방시설의 변화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제2문화층은 약 1m 내외 깊이까지로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층인데, 주로 목조 건물터와 기와편,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자기로는 문양이 화려한 소위 ‘왜사기’라고 하는 근대 자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 불탄 흙으로 덮여 있어 화재로 붕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의 부엌 공간에서는 화덕과 물항아리 등 공방工房과 관련된 시설과 함께 일본 동전 380여 점이 출토되었다.
제3문화층은 약 1.6m 내외 깊이까지로 조선 후기의 건물터들과 18~19세기의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초석 아래의 기초시설인 지정地定이 잡석지정, 장대석지정 및 모래立沙지정 등 다양한 형태로 확인되어 당시의 건축기법을 엿볼 수 있었다.
제4문화층은 약 2.5m 깊이까지로 조선 중기의 건물터들과 17~18세기의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층에서도 제3문화층에서 볼 수 있었던 건물터의 다양한 지정들이 확인되었으나 초석 등의 석재들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였다.
제5문화층은 약 3m 깊이까지로 조선 전기의 건물터들과 15~16세기의 백자편과 분청사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층의 건물터는 남측의 시전행랑 건물터를 비롯해서 대체적으로 많은 석재들이 잔존해 있는 상태였다. 이 층 상부의 두껍게 쌓인 불탄 흙은 그 하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볼 때 임진왜란 때 화재에 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제6문화층은 약 3.6m 깊이까지로 조선 초기의 건물터 흔적들이 부분적으로 잔존해 있었고 출토되는 유물 또한 분청사기편으로 15세기 전반의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울 도심 종로의 한복판 땅속에 15세기 조선 초기부터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간의 건물터들과 유물들이 층층이 퇴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전행랑 건물터 및 피맛길
피맛길 남측지역은 시전행랑이 자리했던 곳으로 이곳 역시 피맛길 북측지역과 마찬가지로 땅속은 6개의 문화층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곳의 지형이 남측으로 가면서 낮아지는 관계로 문화층의 깊이가 북측에 비해서 약 1m 정도가 더 깊었다. 가장 상부의 제1문화층에서 하부의 제6문화층까지 켜켜이 건물터들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의 건물터는 파괴된 상태였으나 제5문화층의 시전행랑 건물터는 매우 온전한 상태로 노출되었다.
전체적으로 동서방향의 길이가 약 15m 정도가 잔존해 있었는데, 하나의 단위 건물로 추정되며 규모는 정면인 동서 길이가 약 8m 정도였고, 측면인 남북 길이가 약 6.7m 정도였다. 정면은 크게 약 4m 정도로 나뉘는데 이를 다시 약 2m 정도로 구획하여 온돌방+마루+온돌방+창고 공간으로 구획하였다. 이러한 단위 건물이 대칭적으로 2단위가 노출되었고, 동측의 단위 건물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노출되었다. 온돌방은 고래둑을 한 방은 기와편과 잡석을 이용하여 만들었고 다른 방은 긴 돌로 만들었으며, 마루는 불에 타서 탄화된 원 모습 그대로 노출되었다. 측면은 종로 앞쪽으로 배수로를 두고 그 안쪽에 약 1.5m 폭의 입구 공간을 두었고 그 안쪽으로 온돌방과 마루 공간 등을 약 3.4m 정도로 두었으며, 뒤쪽에 약 1.8m 폭으로 부엌 및 내부 이동로를 두었다. 제5문화층의 시전행랑 건물터 아래에서는 부분적으로 제6문화층의 시전행랑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그 아래로 자연층이 확인되었고 다른 문화층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서, 이 문화층이 시전행랑을 처음에 조성한 태종12년(1412)의 문화층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시전행랑 건물터는 2007년과 2008년에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파고다공원 동측의 종로2가 40번지의 ‘육의전빌딩 신축부지’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곳 땅속도 6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었는데, 시전행랑터에 반지하층이 있었던 건물이 위치했던 관계로 건물터는 제5문화층과 제6문화층에만 잔존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피맛길의 흔적이 뚜렷이 확인되었는데, 약 3.4m 폭으로 600여 년 동안 시전행랑 뒷길로 현 지표까지 퇴적되어 온 모습이 확인되었다. 제6문화층의 피맛길에서는 목책으로 만든 배수로도 노출되었다.
서울 도심 재개발 속의 발굴성과
청진6지구 재개발사업부지 및 육의전빌딩 신축부지 발굴조사를 통해서 우리는 시전행랑 건물터를 비롯한 조선시대 이후 600여 년의 역사적 흔적들이 땅속에 켜켜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문헌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전행랑 건물에 대한 규모와 구조 특히, 조선 전기 한양도성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의 실제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수습된 조선시대 백자편 등은 당시의 생활, 경제 및 문화 연구에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진6지구 재개발사업부지 발굴조사는 서울 4대문 안의 도심에서 개발면적과 상관없이 공사 이전에 문화재 조사를 의무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도심재개발사업에 있어 문화재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원칙을 세운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청진6지구 제5문화층의 시전행랑 건물터는 서울역사박물관의 광장에 이전 복원되었고, 육의전빌딩 신축부지에서 노출된 시전행랑 건물터는 빌딩이 완공되면 지하층 원 위치에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꾸밀 계획에 있어 유적 보존의 모범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글·사진 | 최종규 한울문화재연구원 전통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