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를 지키는 사람들
폐사지를 또 다른 전통 문화재, 제3의 불교 성보로 보고 일찍부터 폐사지의 가치에 주목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전문적인 불교 수행자도, 체계적으로 문화재의 역사성을 공부한 학예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평범한 직장인, 사회복지사, 작가, 공연기획자들로 우연한 기회에 폐사지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폐사지를 재발견하여 새로운 문화상품의 소재로 만들고, 홀로 남은 ‘독거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폐사지 지킴이’운동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폐사지의 보호의 한계성과 제도적인 결핍을 발견하고,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과 인식 확대를 위해 ‘문화복지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모든 길들이 혼자 가기는 지루하거나 힘겨운 것이므로, 들꽃처럼 엉키고 기대어 문화재 애호운동의 향기로운 풀밭을 만들자는 것이다.
폐사지 재발견 운동은 세 가지의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하나는 ‘1폐사지 1지킴이 운동’이다. 지금까지 문헌상에 존재하는 폐사지는 3천여 개가 넘지만, 이 가운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도상에도 100여 개 정도의 폐사지 검색이 가능하지만, 상당수의 폐사지는 아직도 농지나, 과수원, 혹은 낚시터로 남아 무심한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우선 법률상의 보호를 받는 지정문화재들이라고 하더라도 폐사지의 문화재들은 제대로 돌보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재청이나, 자치단체 관련부서에서 제도적인 관리를 하지만, 박물관이나 현존 사찰들에서처럼 물리적인 보호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시민지킴이 운동이 더 절실한 것이다. 이들‘독거문화재’들에 대한‘1폐사지 1지킴이 운동’으로 여주 고달사지, 안성 봉업사지, 양주 회암사지 등에서 지킴이들이 남몰래 다가가 잡초를 뽑고, 안부를 물어 온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만나는 열린 음악회
폐사지 재발견 운동의 백미는 아무래도‘전국 폐사지 투어 콘서트’이다. “I love lost temple”이라는 슬로건으로 매년 한 두 곳씩을 찾아가는 폐사지 투어 콘서트는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폐사지는 아주 좋은 열린 공연장이다.
제행무상의 현장에서 그 절터에 얽힌 현장학습과 함께, 폐사지 소재 창작곡 등으로 만든 화음은 시민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진정한 ‘열린음악회’이다.
폐사지 공연장에는 한정된 좌석도 없다. 풀밭에 앉으면 되고, 나무에 기대면 된다. 화장실도 없고, 전기도 없는 양주 회암사지 음악회에는 연인원 5천여 명이 다녀갔다. 또 2007년 경주 황룡사지 음악회에는 절터의 규모답게 1만여 명이 넘는 폐사지 마니아들이 전국에서 몰렸다.
폐사지 음악회가 되는 이유는 열린 공간에 맞는 무대구성과 폐사지 특성에 맞는 연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청중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폐사지 특유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무한한 상상력과 열린 공간에서의 개방된 감정이 그 파장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부존자원’ 폐사지
폐사지는 망가진 그대로가 역사이다. 따라서 과거 현존 상태의 가람으로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무너진 그대로의 역사와 진실을 사실대로 교육하고 전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폐사지는 대개 전화戰火로 소실되었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유실되었다. 많은 폐사지가 대찰이었던 것은 그만큼 그 시대에는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에 파괴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나 원주 법천사지 같은 곳은 그 시대의 정치적, 사상적 중심지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삶의 안식처였다. 그런 것들이 존재했고, 무너진 이유 그 자체가 모두 생생한 역사의 교과서인 것이다. 양주 회암사지만 해도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과 전망대까지 만들어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열린 학습장으로 제공되고 있다.
폐사지 보호운동은 올해 초 문화재보호기금법이 제정되어 활동에 탄력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이 법안은 최초, 폐사지보호특별법으로 구상되었으나, 타 관련 법률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모든 문화재를 아우르는 문화재보호기금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지금의 발굴되고 알려진 폐사지뿐 아니라, 아직도 방치된 채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훼손으로, 훼손된 뒤에 더 훼손되어가는 무수한 폐사지들의 정확한 현재의 실태와 그에 대한 단계적인 복원 및 활용대책이 시급한 것이다.
아름다운 폐허, 그 스러진 시간 앞에서
이 땅이 오래도록 불교와 인연 맺은 땅이기에 한반도 전체가 국토종합박물관이다. 그리하여 국토 곳곳에서는 향냄새가 난다. 그 향냄새에 취해 풀과 꽃들도 하나같이 향기롭거나 매무새가 곱다. 척박한 마천루 기슭에서 행복과 희망을 저당 잡히고, 삼독三毒의 소음에 시달릴 때, 불현듯 폐사지로 망명한다면 거기에는 아직도 식지 않은 무두불無頭佛의 손길이 있고, 풀벌레들이 전하는 선지식들의 법문이 있다. 폐사지는 찾아오는 이에게 제행무상의 법문을 설한다. 천등불사, 만등불사로 거리를 밝혀도 자꾸 어두워만 지는 세상. 이제 어디서 둥둥 북소리가 울릴 것인가. 이 땅의 모든 부정한 것들, 엉뚱한 것들, 모두가 도깨비걸음으로 저만치 물러 갈 일이다.
글·사진 | 장용철 시인, 문화복지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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