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과 풍수이야기

북한풍수-최창조

chamsesang21 2009. 6. 20. 16:21

1] 공민왕릉 가는 길

2월7일부터 매주 토요일 풍수전문학자 최창조 (崔昌祚) 씨의 '북녘산하 북녘풍수' 를 연재한다.

최창조씨는 본사 통일문화연구소의 북한 문화유산 조사를 위한 2차 방북팀에 참가, 지난해 12월16일부터 27일까지 12일동안 평양을 비롯해 개성.구월산.정방산지구 등을 둘러보고 왔다.

이번에 연재되는 崔씨의 글은 답사가 이뤄진 날짜순서를 따르지 않고 평양편을 뒤로 돌려 만월대.송악산.선죽교.박연폭포 등 우리에게 친근한 개성지구부터 다루게 된다. 崔씨와 동행했던 한국화가 황창배 (黃昌培) 씨의 감흥어린 현장스케치도 함께 실린다.

 

 

개성시 북안동에 자리잡은 남대문 주변의 주택가.

시가지 중심 로터리에 있는 남대문은 1391~1393년 개성 내성을 축조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당초 내성에는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대문 누문만 남아있다.

누문에는 1346년에 주조된 연복사(演福寺)

지난해 12월20일, 북녘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날씨가 쾌청하다.

개성으로 간다기에 어젯밤은 무척 흥분됐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 초기 자생풍수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고고학자인 리선생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 얘기는 현장에서 하기로 하고 먼저 안타까운 일부터 털어놓기로 한다.

그 유명한 기생 황진이 (黃眞伊) 의 무덤이 개성에서 약 40㎞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가까운 곳에는 화담 (花潭) 서경덕 (徐敬德) 의 무덤도 있다는 것이다. 황진이가 서화담.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松都三絶) 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화담을 그리며 지었다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허내어/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누볐다가/정든 님 오시는 날이어들랑 구비구비 펴리라" 는 시조는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기방의 춘정을 몽상케 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이 있다니 놀라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남쪽에서 어떤 기록을 보니 백호 (白湖) 임제 (林悌)가 그녀의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잔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그를 설워 하노라" 는 시조를 짓고 파직된 이후 그녀의 무덤은 실전 (失傳) 돼 버렸다고 했는데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갈 수 없다는 대답이다. 만월대고 선죽교고 다 집어치우고 그 곳을 가보고 싶지만 당연히 그래서 될 일이 아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억지로 잠을 청한다.

황진이가 살아있다면 이런 내 심정을 알아보고 한번쯤 만나주지 않을까 하는 공상까지 하며 20일의 새벽을 맞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새벽이 되니 그녀의 무덤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젯밤처럼 간절하지는 않더라는 점이다. 여성과 밤이 음성 (陰性) 이고 새벽은 양성 (陽性) 이어서인가, 아니면 이제 나 자신 속세에 찌들어 낭만보다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 까닭인가, 모르겠다.

 

개성 공민왕릉 가는 길

오전7시20분 평양 고려호텔을 출발한다. 여기서 개성까지는 '고속도 도로' 로 1백90㎞. 오전9시35분 개성 시내에 들어왔으니 2시간10분쯤 걸린 셈이다. 중간에 교통체증은 전무했다.

송악산이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개성 시내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한적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개성에서 다시 서쪽으로 길을 잡아 5㎞쯤 가면 개성시개풍군해선리에 닿는데 그 곳에 '공민왕릉' 이 있다.

길은 수삼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진 좁은 2차선 도로인데 행인도 많고 가끔 소달구지들도 끼어가고 있어 심심치 않다. 쭉쭉 뻗은 큰 키들이 마치 미루나무처럼 생긴 수삼나무는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특별히 아끼며 전국에 보급한 수종이라 하는데 공민왕릉 가는, 길게 뻗은 길가에 심어진 그 나무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원근화법의 교과서적 형태를 보는 느낌이었다.

공민왕릉은 '국보유적 제123호' 로 그의 부인 노국공주와 함께 쌍분을 이루고 있다. 지하에 돌로 무덤 칸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돌칸 흙무덤' 이며 이미 1905년 일제에 의해 도굴당한 바 있기 때문에 발견된 유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공민왕이 운암사에서 왕비의 명복을 빌며 군신과 맹세한 글에는 "혹 탈취 (奪取) 하고 도용 (盜用) 하는 자가 있으면 신은 반드시 이를 죽이소서"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와 왕비의 능을 도굴한 자들에게 무슨 앙화 (殃禍)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남쪽에서 정자각 (丁字閣) 이라 부르는 능 앞에 있는 제전 (祭殿) 을 북에서는 제사당이라 부른다는 점이다.

 

좀 지루하지만 공민왕의 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민왕의 친형인 충혜왕은 아버지를 이어 제28대 왕으로 등극한다.

충혜왕은 다른 모든 악행은 차치하더라도 자기 아버지의 후궁을 둘씩이나 강간한 파렴치한이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29대 충목왕이고 또 하나가 30대 충정왕이다. 충목왕은 열두살 어린 나이에 죽었고 충정왕은 원나라 순제에게 폐위된 뒤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열다섯살 되던 해 다시 공민왕에게 독살당했으니 자식이 있을 리 없다.

스물두살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처음 선정을 베풀기도 하지만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사랑하던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요승이라 평가받는 신돈 (辛旽)에게 정사를 맡기고 황음무도한 길로 접어든다. 결국 마흔다섯에 신하들에게 살해당했으니 박복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능에 쌍분으로 같이 묻힌 노국공주 인덕왕후는 혼인 후 8년 동안이나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 간신히 잉태했으나 난산으로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그녀의 능인 정릉 (正陵) 은 공민왕이 잡은 자리이고 죽은 뒤 그녀 곁에 묻혀 능호를 현릉 (玄陵) 이라 했으니 결국 오늘의 공민왕릉은 현릉과 정릉 쌍분이 합쳐져 이뤄진 것이다. 공민왕은 공주를 화장 (火葬) 할 생각이었으나 시중 유탁 (柳濯) 의 만류로 그리 하지는 않았다.

능을 조성하는 데만 8년의 세월이 걸렸으니 그 국비의 손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손수 공주의 얼굴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슬피 울었다고 하니 이는 사랑이라기보다 병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하는 일이다.

훗날 망국의 유신 목은 (牧隱) 이색 (李穡) 이 이 능에서 지은 시구를 서울에서 읽었을 때 가슴을 치는 바 있어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에서 베껴온 것이 있는데 이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그의 능 가까이에서 꺼내 다시 읽어 본다.

"정릉에는 세시 (歲時)에 거마 (車馬)가 많이 오나 현릉에는 세시에 사람이 아니오네. 창창한 소나무는 두 능에 둘러섰는데 전각 (殿閣)에 달린 풍금 (風琴)에 비설 (飛雪) 이 흩뿌리는구나. 임금 계실 때 여러번 노셨던 곳 사객 (詞客) 이 시 읊으며 창자가 찢어지누나. 세상을 달관한 중이 스스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뜬 구름을 가리킨다.

아침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울려 범패소리 섞였으나 마침내 어찌 나를 위해 결정하리. 조정 벼슬아치 모두가 전조 (前朝, 즉 高麗朝) 사람, 누가 주지 (酒池) 의 옛 자취를 찾겠는가.

산비탈 누운 비석 글자를 새겼는데 부끄럽다 내 이름이 앞줄에 들어 있네. 옛날 은총 생각하니 콧마루 시어지고 이 천지에 내 한몸이 어찌 이리 외로운가.

" 그에게는 다섯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소생이 전혀 없고 오직 시비 (侍婢) 인 반야에게서 우왕을 낳았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은 폐위돼 강화도로, 강릉으로 유배됐으나 결국 강릉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살해당하고 만다. 그는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호도 받지 못했고 능도 남아있지 않다.

[2] 공민왕릉의 자리

공민왕의 형인 충혜왕이 아버지의 후궁을 욕보이려 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공민왕 또한 자신의 후비 한씨를 신하들을 시켜 능욕케 한 바 있고, 정비 안씨와 신비 염씨 또한 그리하려 했으나 당사자들의 완강한 반발로 실패한 적이 있다. 이러한 그의 변태적이고 범죄적인 성행위는 그의 아들 우왕에게도 유전된 듯하다.

공민왕의 부인 정비 안씨는 왕이 신하를 시켜 자기를 능욕하려 할 때 자결을 수단으로 그를 이겨낸 경력이 있는 여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기의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인 우왕이 그녀의 미모에 이끌려 간통을 시도했다 하니 고려가 망한 것은 인륜을 저버린 그 사실만으로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안씨는 나중에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는 교지를 내린 인물이다. 남편인 공민왕과 아들뻘인 우왕에 대한 원한을 그렇게 갚은 것이라면, 그녀는 나라를 망하게 하여 한을 푼 경국지한 (傾國之恨) 의 여인이 되는 셈이다.

풍수를 따지기 이전에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바라보는 공민왕릉의 전경은 우선 해괴했다.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능의 명당구 (明堂口) 를 들어서며 나타나는 능 주변 산의 기운은 마치 산람 (山嵐 : 산에 이내처럼 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 듯했고 뭔가 더러운 것을 버리고 들어가야 할 어떤 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일행 대부분이 거기서 소변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땅 기운에 그런 요사스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이론에 입각한 왕릉의 풍수를 따져 보자.

공민왕릉의 주산 (主山) 은 봉명산 (鳳鳴山) 이다. 넓적한 종을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의 금성 (金星) 인데 주산의 가운데 맥을 타고 내려와 정남향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이론풍수의 현무수두 (玄武垂頭) 그대로다. 현무란 능 북쪽 산을 가리키니 즉 주산이요, 수두란 대체로 우뚝 솟은 모양을 말하니 이 또한 이론을 따른 무덤 터잡기로 짐작된다.

공민왕은 10년쯤 원나라에서 살았고 사랑하던 부인이 원나라 사람이었던 만큼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의 능에서는 처음부터 자생풍수의 흔적을 찾을 희망을 갖지 않았는데, 현장에 와서 보니 정말 그렇다.

 

공민왕릉 무덤 안에는 고구려의 풍습을 이어받아 벽화를 그려놓았는데 먹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색을 칠했다.

천장에는 해․북두칠성․삼태성이 뚜렷하고 동․서․북향 벽면에는 12지신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쌍분 중 공민왕릉이 서쪽이고 왕비릉이 동쪽인데 공민왕을 중심으로 보자면 그의 왼편에 부인이 묻힌 것이니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백호 (白虎) 는 봉명산 줄기를 그대로 받은 소위 본신용호 (本身龍虎) 로 능침의 위요 (圍繞 :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그럴싸하다.

청룡 (靑龍) 은 무선봉 (舞仙峰) 으로 역시 둥그스름히 명당을 둘러싼 품이 완연한데 정자각 뒤 무선 아래에는 '국보유적 제152호' 인 '광통보제선사비 (廣通普濟禪寺碑)' 가 서있다. 거기에는 능과 절의 조성 경위가 써 있지만 내용을 소개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데 1996년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유물도감' 제20권에는 '봉명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려온 무선봉의 나지막한 산 중복에 남향하고 있는데 주변 지세는 풍수설에 잘 어울린다' 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본신용호에 대한 개념이 분명치 않아 일으킨 착각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맞은 편 백호 쪽에 광통보제선사 (廣通普濟禪寺)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앞의 안산(案山) 은 능침에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는데 이름은 아차봉이라 하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고 한다. 왕비가 죽자 공민왕은 거의 광분하다시피 하며 당대 최고의 국풍수 (國風水) 들을 끌어들여 명당을 잡게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곳이 없던 차에 어느 날 노풍수가 (老風水家)가 나타나 자신이 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능터가 바로 그 자리다. 한데 공민왕은 그를 바로 믿지 못하고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저 앞산에 있다가 마음에 들면 붉은 수건을 들 것이고 나쁜 마음이 들면 흰 수건을 들 것인 즉 그리 시행하라" 고 했다.

공민왕릉 맞은편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산이 안산인 아차봉이다.

공민왕이 자기 실수로 죽음을 당한 노지관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아차'했다 해서 그런 산이름이 붙었다.

17X28cm

 

그런데 아차봉에 앉아 상지 (相地) 를 심사하던 공민왕은 그곳이 명당임을 알아차리고 기쁜 마음에 자신의 명령을 잊은 채 아무 수건이나 꺼내어 땀을 닦았다. 그게 마침 흰 수건이라 그 노지관은 죽음을 당했고 공민왕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아차'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차봉이 됐다는데 이는 흔히 있는 풍수설화로 그리 신기할 것은 없다. 아마 현대 지관들이 본다면 전형적인 문필봉 (文筆峰 : 붓끝처럼 뾰족한 산 모양) 으로 볼 산세다.

좀 정리하자면 주산과 백호는 거의 완벽하고 청룡은 좀 허결함이 엿보이며 안산은 문필봉에 5중으로 중첩된 옷깃을 여민 모양 (襟帶) 이니 명당임에 분명하지만 물 (水局) 이 보이지 않는 것이 흠이다. 동남방에 임진강이 50리 상거요 남남서에 예성강이 있다 하나 역시 20리나 떨어져 있어 그것으로 명당 수국을 삼기는 어려운 일이다. 수려하지만 결코 웅혼한 기상이 있는 터는 아니다.

그러니까 공민왕릉은 사신사 (四神砂) 를 제대로 갖춘 교과서적인 명당이라 할 수 있다. 경치 또한 아름다워 그림에도 능했던 공민왕의 예술가적 기질을 반영한 듯해 재미가 있다.

능속의 '돌방' 에는 12지신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으나 일제의 도굴 당시 하나가 훼손돼 지금은 11개만 남아 있다.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었으나 축소 모사품을 보니 12지신상이 그려진 벽면 외에 천장에는 삼태성과 북두칠성, 그리고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 북두칠성과 일월도는 자생의 풍속을 따른 듯하지만 삼태성은 분명 중국의 영향일 것 같다.

그가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는지는 무덤 속에까지 자신의 무덤 석실과 왕비의 무덤 석실에 '혼구멍 (遊魂穴)' 을 뚫어 왕래를 시도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정신적 질환이란 것을.

이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문득 최근 남한에서 일어났던 산소자리 잡기라는 해괴한 음택풍수가 유행했던 일이 떠오른다. 항간의 소시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까지 그 일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지 않았는가.

그래서 많은 산소들이 대단한 치장을 하거나 언필칭 명당 길지라는 곳으로 이장됐고, 새로 생기는 산소들을 잡아주느라고 꽤 많은 지관들이 돈을 긁어 모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 결과가 고작 오늘의 국가적 외환위기라는 것인가.

지금도 큰소리치고 있을 한몫 잡은 지관들은 명당 발복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는 말로 발뺌을 하고 있을테지만 혹 어떤 지관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식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런 이들은 더욱 큰소리치며 자신이 당대 최고수인 풍수라고 호들갑떨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고려와 조선왕실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수들을 동원해 그들의 산소자리를 잡은 집안이다. 지금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됐는가. 대답이 필요없을 것이다.

[3] 왕건릉

공민왕릉을 떠나 고려 태조 왕건릉으로 향한다. 공민왕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행정지명은 역시 개성시개풍군해선리다. 가는 길에 좀 자세하게 송악산을 바라본다. 첫 눈에 송악산 모습이 마치 서울근교 송추나 일영 쪽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입구 쪽에서 바라본 고려태조 왕건릉. 무덤 뒤편의 주산 등성이가 너무 낮아 일견 허전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낮고 평범하기는 주위 사신사가 다 마찬가지여서 우리식 풍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왕건릉의 이름은 현릉 (顯陵) 이다. 기록에 의하면 송악산 서쪽 파지동 (巴只洞) 남쪽에 있다고 했다. 현릉은 세번 이장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곳이 바로 그 파지동인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위치로 보나 태조릉이라는 고려조의 상징성으로 보나 비록 전란 때문에 이장했다 하더라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 나와 리정남선생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물론 풍수 원칙에 따르면 이미 썼던 땅 (破舊) 은 쓰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이 원래 자리냐 하는데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원칙에 구애받던 조선시대가 아니라 자생풍수가 힘을 쓰던 고려 초기임을 감안한다면 원위치일 것이라는 가정이 더 설득력 있다.

붉은 한복을 입은 여성 안내원이 찬바람 속에서 '金주석' 의 친필로 각인된 '고려 태조 왕건 왕릉 개건비' 뒷면에 새겨진 '헌시 (獻詩)' 를 시낭송회처럼 읽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헌시' 내용보다 그녀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 더 눈길이 쏠렸다. 그녀는 예전 남쪽 여자들처럼 손목 안쪽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남과 북의 비슷한 삶의 자취가 거기 멈춘 듯 싶었다.

현릉은 왕건과 그의 본부인 신혜왕후 柳씨를 함께 묻은 단봉 (單封) 합장릉 (合葬陵) 이다. 좌향 (무덤 방위) 은 약간 서쪽으로 틀어진 남향을 취하고 있다. 무덤 안은 '돌칸 흙무덤' , 다시 말해 석실로 조성돼 있다.

현릉의 주산은 송악산 지맥인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가 맡고 있다. 말이 주산이지 실제 보면 능 뒤가 허전하게 보일 정도로 낮다. 따라서 주산의 개념에 따라 능터를 잡았다기 보다 만수산 등성이 곧 안부 (鞍部)에 편안한 터를 골랐다고 평하는 것이 바르지 않을까 여겨진다.

구태여 내룡 (來龍 : 명당을 만들기까지 내려오는 산의 모양) 의 맥세 (脈勢) 를 따지지 않은 것은 자생풍수의 영향이라 짐작한다. 무덤 뒤가 허전할 정도로 낮은 경우는 고분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뒤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다. 멀리 능 입구에서 보면 뒤에 산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니 말해 무엇하랴.

주위 사신사 (四神砂 : 청룡.백호.주작.현무) 도 모두 낮은 둔덕에 잔솔밭이니 평탄하고 평범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요즈음 지관들이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좋지 못한 산소자리로 평가할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리선생이 이런 얘기를 한다. "이곳이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의 무덤인데 어떻게 이토록 땅이 좁고 규모가 작은 곳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들을 했다" 는 것이다.

왕건릉 주변 지세 개념도

 

그러나 나는 이곳의 그런 성격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전형이라고 말해 주었다. 마치 고향의 어머니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 어머니는 결코 잘나거나 드러나는 분이 아니다.

이곳의 산세뿐만 아니라 땅의 성격 또한 평범하기만 한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으니 자생풍수의 입장으로 보자면 탁월한 터잡기라고 설명하자 리선생은 대번에 동감을 표시한다.

이 점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왕건 태조의 능이 이 정도 산세밖에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던 차에 어머니같은 땅이라는 자생풍수적 내 설명에 조사단 일행이 공감하는 듯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우리네 정서의 바탕이다. 여기서 사신사를 관찰하고 좌향을 따지고 수국 (水局 : 무덤을 싸고 흐르는 물의 모양새) 을 고르며 명당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왕건릉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면 눈앞에 7릉 무덤떼가 펼쳐진다.

태조릉 주변의 나지막한 야산에 고려왕족들의 무덤이 무더기로 몰려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7개 무덤중 하나다.

예쁜 여자 (땅) 는 처음에 사람을 미혹시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이 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성격까지 나쁘다면 그런 여자 (땅) 를 고른 사람의 고생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더분하고 모나지 않으며 있어도 표가 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그것이 바로 자생풍수가 명당으로 꼽는 어머니같은 땅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일행은 능 아래서 모두 정겹게 술을 곁들여 '곽밥' (도시락) 으로 차디찬 점심을 들었지만 그 맛은 어머니가 해준 더운 밥과 다를 바 없었다.

무덤 내부 석실은 동쪽 벽에 참대와 매화와 청룡이, 서쪽 벽에는 노송과 백호가 그려져 있다. 다만 북쪽 벽면에 있어야 할 벽화는 도굴로 파괴돼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남쪽은 출구이니 당연히 벽화가 없다.

청룡.백호 따위는 고구려 때부터의 전통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참대와 매화와 노송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아마도 왕건이 얻었던 29명 아내들의 집안을 상징하는 문장이거나 그 집안이 있던 고장의 특징적인 자생 수종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 안에는 커다란 판석으로 된 판대가 놓여있고 거기에 관곽이 놓여졌을 것이라 한다. 다행히 도굴꾼들이 미처 챙겨가지 못한 '국화 무늬박이 청자 잔' '옥띠 고리' '놋 주전자' 와 몇가지 '금동 장식품' 이 발견돼 무덤 내부의 호사스러운 치장을 짐작케 해준다.

'무덤무지' (봉분) 둘레에는 12각으로 둘레석을 세웠고 사이에는 난간석을 얹었다. 지금 둘레석은 93년 개건 당시 화강암으로 다시 새겨놓은 것이라 옛 맛을 찾을 수는 없다.

능 입구의 정자각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으나 54년 복구했다고 한다. 태조의 영정과 능행도.서경순주도 등이 벽면에 그려져 있어 왕건의 일생을 형상화했다.

24X61cm

 

능을 바라보며 왼쪽 등성이를 오른다. 시야가 확 트이며 오른쪽으로는 송악산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이곳보다 험한 산세에 고분이 여럿 눈에 띈다. 바로 '7릉떼' (七陵群) 다. 무덤 주인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 후기의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풍수적으로 그런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곳에 있는 무덤들은 분명한 주산에 의지해 내룡 (來龍) 을 짐작케 해주는 입지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풍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쉽게도 능 하나하나를 답사할 시간은 없었지만 아마도 그런 추정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 이제야 만월대를 만나다

왕건릉을 떠난 버스는 어리고 작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한 야산들을 멀리하고 수삼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개성시내로 접어든다. 북안동의 남대문은 단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느낌인데 생각했던 것 보다 규모가 작은 편이다.

남대문은 본래 개성 내성 (內城) 의 남문이다. 개성의 성곽은 궁성과 황성을 핵심으로 그 오른쪽 (동쪽) 을 지탱해 주는 내성, 그리고 송악산을 정점으로 서쪽의 제비산, 남쪽의 용수산, 동쪽의 덕암봉과 부흥산을 거쳐 다시 송악산으로 연결되는 도성 (都城) 인 나성 (羅城) 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나성은 개성분지 전역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되는 셈이다.

만월대란 그 중 궁성과 황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터 안에 '만월대' 라 불리던 궁전이 있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이 궁궐 전체를 만월대라 부르게 됐고 그로부터 만월대는 개성의 대표이자 상징물이 된 것이다.

 

고려왕조 5백년의 도읍지로 그 번창함은 개경에서 예성강까지 비오는 날에도 처마 밑으로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었다는 개성이지만, 그날 나는 만월대의 그야말로 추초 (秋草) 아닌 동초 (冬草) 로 덮인 폐허를 만나는 것으로 수인사를 해야만 했다.

만월대로 들어서는 첫머리에서 문루와 주춧돌․문지방돌 20여개가 남아 있는 신봉문 터를 만날 수 있다.

만월대 유적 주변에는 농가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주민들은 낯선 우리 일행을 맞닥뜨리자 잔뜩 호기심이 어린 눈초리로 거동 하나 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개성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분지 지세다. 커다랗다고 했지만 그것은 지형적 의미로 그렇다는 것이고 한 나라 수도로서의 기반적 토지 규모로는 협소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편이다.

풍수에서는 이와 같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를 장풍국 (藏風局) 이라 한다. 반면 서울이나 평양처럼 일면 또는 양면이 큰 강에 접한 경우는 득수국 (得水局) 이라 한다. 개성은 대표적인 장풍국의 땅이다. 그래서인지 개성 시가지가 좀 우중충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분지라 매연물질이 잘 빠져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장풍국이기 때문에 개성의 주산 (主山) 은 진산 (鎭山) 과 일치한다. 주산 송악산은 해발 4백89m로 바다에 인접한 개성과 같은 지세에서는 상당히 높은 산이다. 실제로 개성 시내는 해발 20m에서 30m에 지나지 않으며 만월대의 정궁인 회경전 (會慶殿) 터가 50m다. 그러니 송악산의 상대적 높이 (比高)가 훨씬 높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는 북악산이 3백42m지만 남쪽이 한강에 둘러싸인 넓은 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낮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았지만 그를 보완하기 위해 그 뒤에 있는 8백37m의 북한산을 주산으로 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조산 (朝山) 인 6백32m의 관악산을 압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주산 현무에 이어지는 나머지 사신사 (四神砂) 는 나성 성곽과 거의 일치하니, 백호는 제비산 (이산이 지네산이라 불리는 蜈蚣山임) - 야미산 줄기가 되고, 청룡은 부흥산 - 덕암봉 연맥이 되며, 시내 가운데 있는 자남산과 남쪽 끝 용수산 - 진봉산 - 덕적산 줄기가 안산 (案山) 과 조산이 돼 완벽한 사신사의 장풍국을 이루는 형세가 된다.

다시 그 내룡 (內龍) 의 맥세 (脈勢) 를 보면 당연히 백두산을 조산 (祖山) 으로 오관산을 종산 (宗山) 으로 삼아 송악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개성의 주산인 것이다. 내룡은 서북서 방향 (이를 풍수 24방위에서는 亥方이라 함)에서 들어와 (이를 풍수에서는 入首라고 함) 정남향 (子坐午向) 으로 만월대 혈 (穴) 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개성 풍수의 개략이다.

 

술가 (術家) 는 이를 평해 청룡과 백호가 좌우를 겹겹이 감싸고 (龍虎幾重) , 앞산이 중첩되게 명당을 호위하며 (對朝重疊) , 사방 산신은 혈을 철저히 옹위하는 (四君護衛) , 산 속에 우묵하게 숨겨진 좋은 고을 터 (山陰洞府藏風局) 라 극찬했다.

당시 고려의 국내 정세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아직 지방 호족들의 발호나 반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방어에 허점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평지의 땅 (平陽龍勢) 이나 득수국 (得水局) 의 땅보다 이런 지세가 유리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태조 왕건이 호족세력을 인척으로 삼아 잡아두기 위해 각 호족의 딸들을 29명이나 왕비로 삼았겠는가. 그러니 당시 정세로는 잘 잡은 수도 입지라는 것이다.

개성 궁성의 정문격인 남문은 주작문이고 황성의 남문은 승평문이지만 흔적이 없다. 크게 네번의 화재를 당한 만월대가 최후를 마친 것은 공민왕 10년 (1361) 홍건적이 불을 지른 때였다. 그 후 오늘까지 만월대는 폐허의 비장감과 고적감만을 내보일 뿐 그 미려하고 장쾌했던 화사함을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만월대 폐허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유지 (遺址) 는 신봉문 (神鳳門) 터다. 문루의 주춧돌과 문지방돌 20여개만 땅에 붙박여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만월대 안내판을 처음 접하게 되는데 현재 국보유적 제122호로 지정돼 있음을 알리고 있다.

신봉문을 지나면 약간 오른쪽으로 길이 굽으면서 창합문 (閤門) 터가 나온다. 역시 남아 있는 것은 주춧돌과 계단 난간석 뿐이다. 이어서 만월대를 대표하는 그 유명한 회경전 터의 앞 계단을 만나게 된다. 모두 두쌍 네개의 계단인데 하나의 계단은 33개의 돌 층계로 구성돼 있다. 불교국가여서 33천을 표상한 33계단이 아닌가 짐작해 보지만 알 수 없다는 대답이다.

수직 높이 약 7.5m, 멀리서 보면 그저 그런 계단처럼 보이지만 막상 바로 앞에 서면 무척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경사도 보기보다 훨씬 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원지형면을 가급적 깎아내지 않고 자연지세를 손상치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단 위에 올라 회경전 뜰을 보면 그 터를 조금 더 깎는 일이 당시로서 별로 큰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참고 자연 훼손을 삼가던 고려인의 땅에 대한 외경심이 바로 우리 자생풍수 사상의 요체라 보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계단 아래 선 사람들에게 권위주의적인 공간배치를 실감케 해주는 실익도 있었으리란 짐작이 든다.

[5] 만월대, 그 자생풍수의 표본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하면서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지세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점이다.

낮은 곳은 축대를 높이 쌓고 높은 곳은 깎아내리지 않은 채 계단을 쌓아 올라가는 식으로 처리한 뒤 그위 경사면에 궁궐을 지어놓았다. 더구나 창합문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만월대 앞쪽의 회경전 (會慶殿) 과 송악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자리잡은 장화전 (長和殿) 은 만월대의 중심되는 2대 궁궐이며 서로 이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의 만월대 터에는 고려의 영화를 전하는 궁궐은 간데 없고 주춧돌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만월대는 한눈에도 조선 궁궐과는 달리 터잡기나 건물배치에 가능한한 자연지세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하는 자생풍수의 전형이 느껴졌다.

앞서 입구인 신봉문에서 창합문으로 올라가는 대궐 진입로도 조금 틀어져 있었다고 지적했다시피 회경전과 장화전을 서로 다른 평면상에, 그것도 서로 다른 좌향으로 건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들이 중국의 풍수술이나 건축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였다면 당연히 동일 직선상에 동일 좌향을 취했을 것이다. 그 점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뒤 건축된 조선시대 건물들의 터잡기와 배치가 기하학적 균형을 갖추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이것을 나는 자생풍수의 증거로 보는 것이다.

중국 이론 풍수가 체계화된 이론에 따라 터를 잡는 데 반해 자생풍수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의지한다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중국풍수가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 이론적 측면이 강하다면 자생풍수는 풍토 적응성은 뛰어나지만 체계화나 이론화가 매우 어렵다는 단점을 갖게 된다.

땅은 땅 나름대로의 고집과 질서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학 (地理學) 은 그 땅에서 집적된 지혜의 소산이 아니면 땅에 무리를 가하는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여러 유적지에서 내가 느낀 것은 풍수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자연스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땅에 상당한 무리를 가해 가며 구조물을 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중국 이론풍수에 탐닉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틀에 박힌 터잡기와 건축물 배치가 초래한 결과라 생각한다. 만월대에서는 비록 그것이 세련된 맛은 덜 하지만 훨씬 자연스럽고 주위 산천형세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여기에는 또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우리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그의 유기 (留記)에서 이르기를 "송악산 아래 궁궐을 지을 때는 소나무를 많이 심고 절대로 흙을 파헤치지 말 것이며 오히려 토석 (土石) 을 돋워 세우라" 고 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자생풍수의 사고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유언이다.

만월대 뒤로 철벽을 두른 듯한 송악산은 그 모습이 서울의 북한산을 너무도 닮았음에 놀랐다. 내 얘기를 들은 우리 일행 모두가 그에 수긍했으니 나의 주관적 안목만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만약 개성을 고향으로 가진 실향민들이 당장 고향의 상징인 송악산을 보고 싶다면 송추나 일영 쪽으로 가 북한산과 도봉산 연맥을 바라보면 아쉬운 대로 망향의 쓰라림을 조금은 쓰다듬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송악산과 북한산이 닮게 되는 일이 벌어졌을까. 나의 짐작은 이렇다. 조선 태조 이성계 (李成桂) 는 개성의 산천을 수도의 전형적 형상으로 마음 속에 새겨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의 성격이 송악산과 같은 산을 선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오래 전 양주 회암사를 답사했을 때 이런 감회를 기록에 남긴 바 있는데 오늘 그것을 다시 들춰냄으로써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코자 한다.

양주 회암사는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이 깊게 닿아 있는 절이다. 절 뒤쪽에는 칠봉산으로 뻗은 등산로가 있다. 그 등산로 중턱에 올라서서 주변 형세를 관망해 본다. 문득 이성계의 성격에 생각이 미친다.

사람들은 자기 성격에 어울리는 터를 찾는 습성이 있다. 진취적이고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품의 사람은 툭 터진 산등성이를 좋아한다.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사람은 안온하게 사방이 산으로 닫힌 전형적인 명당 터를 즐긴다.

20X45cm

 

이로써 역사상 인물에 대한 환경심리학적인 성격 추정이 가능하리라 보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된 바는 없다. 풍수를 하는 입장에서 이성계가 선호한 터들을 살피다보면 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떠오른다.

회암사터 역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해 흥미롭다. 그가 즐겨한 땅들은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곳으로만 따져 함흥 일대, 서울의 북한산.북악산.인왕산.계룡산, 그리고 이곳 천보산 일대다.

함흥은 본 일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북한.북악.인왕.천보.계룡은 모두 곳곳에 암석 쇄설물들이 깔려 있고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정상을 압도하는 풍광의 산들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덕있는 산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는 냉랭한 살기가 산 전반에 은은히 내비치고, 강골 (强骨) , 척박 (瘠薄) 의 기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식한 천박성이 드러난 것은 아니니, 좋은 의미에서의 전형적인 무골 (武骨) 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의 산들인 것이다.

그런 산들의 계곡 사이사이에는 의외로 비옥한 토양이 산재해 수목을 울창케 해주니, 실로 절묘한 풍운아적 풍모라 아니 할 수 없다.

쿠데타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게 마련인 단순성과 강직성, 그리고 무모함 따위가 산의 성격에도 배어 있다니 실로 감탄스러운 자연의 조화속이다. 더욱 절묘한 것은 이런 산들이 지금도 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북악과 인왕은 청와대 경호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이 군 주둔지가 돼 있고, 계룡대에는 삼군 (三軍) 본부가 자리잡고 있으며, 회암사 뒷산도 군 훈련장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그 산들의 성격을 사람들이 잘 파악해 그에 맞는 입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개성은 이성계에 의해 피로 물들여진 곳이다. 아무리 그의 성격에 송악산이 맞고 그의 심상에 수도 주산으로서 송악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중하다 하더라도 송악산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개성을 떠나고 싶어했으리라. 이 점은 그가 고려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아직 나라 이름을 짓기도 전에 서울부터 먼저 옮길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6] 개성과 만월대의 풍수 비보책(裨補策)

다시 만월대로 얘기를 돌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송악산은 형세와는 달리 그 지기지세 (地氣之勢 : 산 모양이 아니라 성격으로 산의 흐름을 살피는 일)가 만월대 쪽으로 휘어져 있다. 만월대가 기하학적인 직선구조를 유지하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도 알겠다. 주변 둔덕에는 일반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무덤이 눈에 띈다. 개성이 오랜 도시임을 말하는 예일 것이다. 또 그 주위에는 과수원이 꽤 많다.

회경전(會慶殿)은 일종의 구릉지에 터를 조성하고 세운 만월대의 정궁이었다. 터의 수직높이가 7.5m 정도인데 거기 오르려면 각기 33층계로 이뤄진 4개의 돌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회경전은 동서 59.4m, 남북 1백20.6m의 회랑에 둘러싸인 건물이었다고 전한다.

 

과일나무의 특성상 과수원은 대부분 기온이 따뜻한 곳에 있게 마련이다. 과수원이 많다는 것은 이곳이 상대적으로 주변 지역보다 기온이 높다는 의미일 터인데 과연 그럴까? '개성시 문화유적 관리소' 에서 나온 깡마르고 점잖은 풍모의 안내원 노인이 바로 "그렇다" 고 대답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곳은 송악산 연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다른 곳보다 따뜻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분의 얘기로는 송악산 북쪽인 박연폭포 쪽 마을과 이곳은 겨울 평균기온이 5~6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박연폭포는 이상 난동임에도 불구하고 추위 때문에 있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이제 잠깐 숨을 고르고 풍수술법에서 말하는 몇가지 황당한 도참적 예언과 그와는 달리 합리성이 감춰져 있는 풍수 비보책에 관해 말해보자.

36X21cm

 

먼저 왕건 (王建) 의 가계를 알아야 하겠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처음 개성에 이주한 王씨의 원조 (遠祖)가 호경이고 그의 아들이 강충이다. 강충의 둘째 아들이 읍호술인데 그는 나중에 이름을 보육으로 고친다. 보육의 딸 진의가 당나라 숙종 ( '여지승람' 에는 선종으로 돼 있음) 과 관계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고 작제건의 아들이 용건이며 그의 아들이 왕건이다.

이미 신라 말 최치원 (崔致遠) 이 "계림황엽 곡령청송 (鷄林黃葉 鵠嶺靑松)" 이라는 참구 (讖句) 를 남겼다고 하는데, 계림은 경주요, 곡령은 개성이니 신라는 망하고 개성에 새 기운이 일어난다는 뜻일 것이다. 여하튼 이때부터 소나무가 등장한다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대표적인 소나무 얘기는 신라의 풍수 술사 감우 팔원 (八元) 이 강충을 찾아와 삶터를 부소갑의 남쪽으로 옮기고 헐벗은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으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란 예언을 한 것이다. 지금도 송악산은 화강이 몸체를 그대로 드러낸 동산 (童山 : 나무가 자라지 않은 산)에 가깝다.

소나무는 악지에서도 잘 자라는 수종이므로 이는 적절한 지적이라 할 것이다. 또 늘푸른 나무인데다 한 구멍에서 반드시 두 잎만 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상징으로 소나무를 크게 숭상한다. 요즈음 한 구멍에서 세 개의 잎이 나는 소나무가 많은데 그것은 왜송 (倭松) 이라 하여 재래의 소나무와는 다른 것이다.

한편으로 소나무 껍질이 거북이의 등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사신사 중 북쪽 현무 (玄武)에 해당한다 하여 지금도 무덤이나 능의 북쪽 면에는 병풍을 둘러치듯 소나무를 심는 관습이 있다. 그러나 이런 도참류의 얘기는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예컨대 '금돼지가 쉬는 곳 (金豚墟)' 과 같이 내용이 황당해 설화적 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풍수적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성의 백호세가 강하고 청룡세가 약해 무신 (武臣) 의 난이 자주 발생하고 훌륭한 문신이 나지 않는다거나, 여자들이 너무 설쳐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는 따위의 얘기도 있다. 청룡은 해 뜨는 동쪽으로 남자.주인.임금.명예 등을 표상하고, 백호는 해지는 서쪽으로 여자.손님.신하.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 풀이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단지 무대에 지나지 않는 땅에 책임을 미룰 일이 아니다. 자생풍수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합리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비보인데 그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20X17cm

 

만월대에서 개성 시내를 내려다 보면 남동쪽 시가지 한 가운데에 자남산 (子南山) 이 있다.

현재 '金주석' 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곳은 개성 시내의 중심이자 안산 (案山) 이기도 하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은 역할을 하는 산이란 뜻이다. 본래 만월대의 풍수적 형국은 늙은 쥐가 밭에 내려온 격 (老鼠下田形) 이다. 그런데 자남산이 그 늙은 쥐의 아들 쥐에 해당된다는 것이 문제의 출발이다. 자 (子) 는 십이지 (十二支) 로 하여 쥐이고, 아들이란 의미도 있지 않은가.

이 아들 쥐가 부모 품을 떠나려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 그래서 아들 쥐를 편안하게 해주어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오수부동격의 비보책 (五獸不動格 裨補策) 이다. 먼저 자남산 앞에 고양이를 세워 쥐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고양이 앞에 쥐라고 하듯 그렇게 되면 아들 쥐가 불안해 할 것이다. 따라서 그 고양이를 견제할 개를 만들고 개를 제압할 수 있는 호랑이를 세우며 호랑이가 마음 놓고 날뛰지 못하도록 코끼리를 만드는 것이다. 한데 묘하게도 코끼리는 쥐를 무서워 한다. 이렇게 하여 다섯 짐승이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서로가 안정을 취하고 궁극에는 자남산을 진정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자남산은 산이라 부르기도 쑥스러운 작은 둔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진봉산.용수산.오송산.부흥산 등은 험악한 형상의 높은 산들이다. 개성 시내 거주민들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위용을 갖춘 산이란 뜻이다. 거주지의 지표 상징물인 자남산이 주위에 압도당하는 형세라면 주민들이 환경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건 당연하다. 그를 풍수적으로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오수부동격의 풍수 비보책인 것이다.

개성 시내의 고양이우물 (猫井).개바위 (狗岩).코끼리바위 (象岩).호랑이샘 (虎泉).쥐산 (子南山) 등의 지명은 바로 그 흔적인 셈이다. 만월대를 안내하던 노인은 코끼리바위와 개바위는 알고 있었다.

[7] 개성 남대문과 고려 성균관

45×23cm

 

만월대에 서면 야은 (冶隱) 길재 (吉再) 의 시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대하는 송악산인지라 그것이 옛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산천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맞는 말일 것이다.

현재 개성시내만의 인구는 10만명이고 개성시 판문군.개풍군.장풍군을 합친 인구는 30만명 정도라 한다. 개성을 대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숫자가 적다. 하지만 그 명당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인구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통일되면 임시로 수도를 개성에 둔 채 20~30년쯤 시간을 갖고 파주시 교하면 일대에 새로운 통일 수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개성이 임시 수도로서도 좀 손색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개성 시가지가 나오기 직전 '옛날 기와집 보존지역' 이란 곳을 거쳤다. 오천변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구간의 이 옛집들은 그다지 고색창연하지는 않다. 다만 이곳을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은 이 광경만으로도 감회가 깊을 것이다.

기와는 보통의 흑색기와와 동기와가 있었는데 의외로 '청석기와' 가 눈에 많이 띈다. 멀리서 볼 때는 마치 강원도의 너와를 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청석이다. 튼튼하고 보기도 좋으니 앞으로도 한옥의 기와로는 쓰임새가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 성균관은 나지막한 둔덕으로 둘러싸인 명당자리에 앉혀져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천년을 넘긴 은행나무 등 노거수(老巨樹)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만월대를 안내하던 올해 56세의 노인에게 혹시 '싱아' 라는 걸 아느냐고 물어봤다. 노인은 "물론 잘 안다" 며 오히려 나를 보고 "그걸 어떻게 아느냐" 고 되묻는다. 남쪽의 유명한 여류소설가로 박완서란 분이 있는데 고향이 개성인 그 분의 소설에서 싱아란 식물 얘기를 읽었다고 했더니 자기도 개성이 본 고향이라면서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 사람 얘기로는 싱아는 줄기를 벗겨 먹는데 지금도 5, 6월께 들이나 산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시내로 들어가 북안동에 닿으면 개성 남대문이 나타난다. 남대문은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무지개형의 문 길을 낸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를 얹은 전형적인 성문 형식이다.

문루에 우리나라 5대 명종 (名鐘)가운데 하나인 '연복사종' 이 걸려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 종은 고려 충목왕 2년 (1345)에 만들어졌으나 조선 명종 18년 (1563) 연복사가 불에 타는 바람에 이리로 옮겨진 것이다.

연복사는 본래 이름이 보제사 (普濟寺) 로 비보 사찰중 하나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절 안에 세 못과 아홉 우물 (三池九井) 을 파고 그 남쪽에 5층탑을 세워 풍수에 응하게 했다는 기록이 태조 2년 (1393) 권근 (權近) 이 지은 연복사 비문에 나와 있다.

종의 겉면 장식들이 우아 장중함은 물론 종소리가 아름답고 맑아 그 여운이 1백여리에 뻗칠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타종소리를 직접 들어 볼 기회는 갖지 못했다. 종의 무게는 14t 정도나 된다고 했다.

오후2시50분 방직동에 있는 고려 성균관 (고려 박물관으로도 사용됨)에 도착했다. 높이 32m, 둘레 7m의 1천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이곳이 유서깊은 고적임을 실감케 한다. 넓게는 송악산 줄기인 부흥산이 하늘선에 걸려 있고 가까이는 나지막한 둔덕이 명당을 감싸는 이중용호 (二重龍虎) 형태다.

고려 성종 11년 (992) 국자감으로 시작된 이곳은 충렬왕 24년 (1297) 성균감으로 됐다가 같은 왕 34년 (1307)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남대문은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문루에 옮겨온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건물은 엄격한 유교적 질서에 따라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되게 배치돼 있다. 정문격인 바깥 삼문을 들어서면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명륜당이 나타난다. 단순 소박하지만 장중한 맛이 있는 맞배집으로 당에 오르는 3개의 돌층계는 만월대의 그것을 축소한 듯한 모양이다. 그 양 옆으로는 2칸짜리 향실과 존경각이 자리했고 뜰 양 옆으로는 학생들의 숙소로 쓰였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서 있다. 그 뒤를 돌아가면 안 삼문이 나오고 삼문을 들어서면 역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성전이 나오는데 팔작지붕이라 명륜당보다 보기는 더 아름다우나 장중한 맛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 앞뜰 좌우에는 이름 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동무 (東무) 와 서무 (西무)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이곳 성균관에는 왕건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개성 왕씨 족보며 쌀알.좁쌀알에다 11~12세기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도 전시돼 있었다. 만월대와 수창궁에서 출토된 '룡대가리 (용머리)' 조각은 대성전 양 옆 오른쪽에 수놈, 왼쪽에 암놈을 배치해 놓았는데 그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왜 그런 유물들이 여기 있어야 하는지를 나 자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륜당 옆 존경각 뒤로 돌아나가면 문이 하나 나 있고 그 문을 빠져 나가면 독립된 부속건물이 있다. 그 뜰에는 불일사 5층석탑이 우뚝 솟아있어 이 역시 기이한 감을 준다. 원래 개성시 판문군 보봉산 남쪽 기슭 불일사 터에 있던 것을 1960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정고적 제252호' 로 마치 경주 감은사탑을 대하는 듯한 고졸한 맛이 있는 탑인데 성균관 뒤에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탑을 보고 있는데 저쪽 둔덕 아래에서 웬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가 물 한잔을 청하니 어린소녀가 얼른 한 바가지를 권하는데 감로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머리에 핀을 꽂고 붉은 목도리를 한 단발머리의 그 소녀는 제 키 반만한 물동이를 지게 양쪽에 달고 뒤뚱거리며 둔덕을 걸어 올라간다.

개성이 고향이라는 여성안내원 리선생은 무척 유머감각이 풍부한 듯했다. 그녀는 송악산을 가리켜 "옥녀가 누워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해를 바라보는 형국이어서 '여성의 산' 이라고 한다" 고 설명해 주었다. 송악산을 옥녀산발형 (玉女散髮形) 으로 본 것인데 그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런 내용의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무척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그렇다면 좌견교를 아느냐" 고 하니까 지금은 폭을 넓혀 자동차까지 다니는 다리가 됐다고 한다. 재미있는 안내원선생을 만나 흥미롭기도 했지만 풍수가 전공인 나로서는 의외의 수확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리선생은 미소를 띠며 이런 말도 했다.

"'개성 깍쟁이' 란 말이 있지요. 그런데 그건 서울 깍쟁이란 말과는 뜻이 다른 것입니다. 개성 상인이 유명하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옛날에 개성에서는 상인을 가게쟁이라 했답니다. 그게 각쟁이가 되고 된발음으로 바뀌어 깍쟁이로 됐으니 결국 개성깍쟁이란 개성 상인을 일컫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향사랑이 애틋한 진짜 개성깍쟁이 안내원선생을 만난 덕에 북녘에 와서 처음으로 파안대소할 수 있었다

[8] 선죽교와 좌견교

풍수에 규봉 (窺峰) 이란 용어가 있다. 명당 바깥 쪽에서 명당 안을 엿보는 듯한 봉우리가 있을 때 이를 엿볼 규자를 써서 규봉이라 한다. 명당의 혈장에 섰을 때 주위 산너머로 그 형체가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마치 혈장을 몰래 기웃거리듯 보이는 산체를 말하는 것이다.

38×25cm

 

담장 밖에서 누군가가 뜰 안을 숨어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봉우리이므로 주인에게 심리적인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당연히 풍수에서는 규봉을 꺼리며 원칙적으로 이를 금기시한다.

예컨대 주산 바깥 쪽에 규봉이 있으면 멸문지화 (滅門之禍) 를 당한다거나, 청룡 바깥 쪽에 규봉이 있으면 자손이 융성치 못한다거나, 백호 바깥 쪽에 규봉이 있으면 집안에 맹인이나 음탕한 사람이 나온다는 식이다. 그런 술법 (術法) 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도읍 풍수에서 규봉은 그 거주자에게 환경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는 개연성 때문에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에서는 서울의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인다. 나는 북한산에서 송악산을 본 적은 없지만 관악산에서 송악산을 본 적은 있다. 날씨만 좋다면 북한산에서 송악산, 송악산에서 북한산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북한산이 바로 개성의 규봉이 돼 버린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개성 터를 보던 날은 마침 날씨가 흐렸던 탓에 미처 북한산 규봉을 보지 못한 채 이곳을 천년 왕업의 터로 지정했다고 한다.

국사가 나중에야 이를 확인하고 그를 누르기 위한 비보 (裨補) 의 대책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좌견교와 상명등 (常明燈) 이다. 규봉은 집안을 엿보는 도둑의 형상이므로 그 도둑을 막기 위해 불을 밝히고 개를 세워 둔다는 개념이다. 과거 청교면 덕암리의 등경암 (燈擎岩) 이 상명등에 해당되는 것일텐데 똑똑한 안내원도 그것은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개성 나성 (羅城) 동쪽 선기문 옆 덕암봉이 그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포살당한 곳으로 유명한 선죽교는 길이 10m도 안되는 작은 규모의 다리다.

포은이 피흘린 자리에 참죽이 자랐다는데 지금은 흐릿한 얼룩 이외에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쇠로 12개의 개 (犬) 를 주조해 개성의 동남쪽에 배치함으로써 북한산의 규봉을 억압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선죽교 남쪽 오천 (烏川)에 다리를 놓고 개가 쭈그리고 앉아 도성을 지켜준다는 뜻으로 다리 이름을 좌견교 (坐犬橋) 라 했다고 한다. 좌견교가 실재한다는 사실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본래 개성은 수덕 (水德) 이 불순하다는 풍수적 평가를 받던 땅이다. 수덕 불순을 이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실제로 개성은 해마다 수해 (水害) 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수덕 불순은 술법상의 얘기만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왜정때 동대문 터 부근의 얕은 맥을 끊고 중앙 한 곳에 모이는 물을 모두 이곳으로 유인해 내성 밖 선죽교 방면으로 보냄으로써 오천과 합류시켰다고 한다. 이 물은 나성의 보정문 (장패문) 아래 수구문 (水口門) 을 통해 성 밖으로 배출되는데 현재 수구문은 장패문 수문이라 불린다.

개성의 풍수적 결함을 한가지만 더 추가하자. 앞으로 소개할 박연폭포는 개성 북쪽에 위치한다. 성거산.천마산 연맥을 이어 만든 대흥산성 북문 바로 밑에 박연폭포가 있는데, 천마산은 오관산을 거쳐 송악산에 연결된다. 그래서 어떤 기록에는 개성의 진산을 오관산, 주산을 송악산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바로 그 천마산 남쪽, 오관산 옆에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의 부아봉 (負兒峰) 이란 5백m쯤 되는 산이 있다. 서쪽에서 보면 완전히 절벽같이 생겼는데 흙 한점 보이지 않고 창을 박아놓은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극암 (戟岩) 이다.

태조 왕건은 이곳을 세가지 재앙이 터져나올 터 (三災發作之地) 라 하여 돌기둥 (石棟) 을 세우는 한편 만월대를 향해 창을 품고 달려드는 듯한 기세의 능선에는 불을 밝혀 성등 (聖燈) 이라 하고 이를 지키는 암자를 성등암 (聖燈庵) 이라 했다고 하나 이번에 직접 답사하지는 못했다.

고려 성균관을 나서면 바로 선죽교를 만난다. '고려사 (高麗史)' 에 의하면 고려 고종 3년 (1216) 이전에 건설됐다고 하며 당시 이름은 선지교였다. 고려말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가 이 다리에서 조영규 (趙英珪) 무리에게 피살된 후 그 자리에 참죽이 자라자 그의 절개를 기려 선죽교로 고쳤다. 다리 한 부분을 가리키며 "저 핏자국을 보라" 는 안내인의 설명이 있었지만 그저 흐릿한 얼룩 이외에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38호'인 표충각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석비가 두개 세워져 있다.

 

한데 진짜 선죽교는 난간을 세워 통행을 막아놓았고 그 바로 옆에 난간도 없는 돌다리를 놓아 그 곳으로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있었다. 정조 4년 (1780)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난간을 세운 뒤 다시 다리를 그 곁에 놓아준 것이라 한다. 선죽교 옆에는 '善竹橋' 라고 쓴 석비가 서 있는데 명필 추사 (秋史) 김정희 (金正喜) 의 글씨라 한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조그마한 다리임에도 개성의 상징처럼 됐으니 이는 돌다리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생실 (화장실)' 을 찾을 수 없어 안내원의 묵인 아래 선죽교 맞은 편에 있는 표충각 담장을 돌아 눈치껏 소변을 본다.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현장 사정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주기 바란다.

'국보 유적 제138호' 표충각에는 두개의 석비가 있다. 하나는 영조 17년 (1741)에, 또 하나는 고종 9년 (1872)에 새긴 것인데 내용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조선의 임금에게도 그러한 충성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9] 선죽교에서 박연폭포로

선죽교 안내원은 타고난 관광안내원이다. 그녀는 선죽교에 얽힌 일화를 시조로 엮어 들려주었는데 그 줄거리는 이렇다.

당시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 의 집은 개성 서쪽 선죽동에 있었고 이성계 (李成桂) 의 집은 동쪽 덕안동 (현재 승전동)에 있었다. 정몽주가 노모의 병 문안을 가니 노모는 이미 어떤 낌새를 채고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고 하며 집을 나가지 말라고 권한다.

화담(花譚)서경덕․황진이와 함께 송도(松都) 3절(絶)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폭포. 37m 높이에서 쏟아져내리는 폭포 아래 고모담(姑母潭)가에는 얇은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한기를 돋우는 시퍼런 겨울 못물 앞에서 동행한 황창배 화백이 시린 손을 불며 즉석 스케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포은은 노모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길로 방원 (芳遠) 을 찾아간다. 방원은 포은을 맞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혀져 백년같이 누리리라" 는 회유의 시를 읊는다. 만수산 (萬壽山) 은 개성 서쪽 두문봉 북방에 있는 산으로 고려 역대 왕릉이 많이 있어 고려의 북망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이에 포은은 그 유명한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죽교 앞에서 그런 설명을 듣는 정경이 그 자체로서 훌륭한 관광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개성 시내를 벗어나니 이제는 눈에 익은 송악산 (松嶽山) 이 반석처럼 버티고 서서 우리의 우측을 압도하고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송악산에서 소나무는 없어지고 악산만 남은 것 같다" 는 말을 했다. 과장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산에 나무가 너무 적다.

송악산이 부소갑이었을 때 신라의 술사 감우 팔원이 소나무를 심으라고 했는데 이제 다시 송악산이 동산 (童山) , 즉 민둥산이 됐으니 내 비록 술사는 아니지만 송악산에 소나무 심기를 권해본다. 잠시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왼쪽으로 제석산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차는 오른쪽으로 꺾어져 완연한 산길로 들어선다.

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60리라는 데 길이 험해서인지 시간이 꽤 걸린다.

오후4시50분. 이미 짙은 그늘이 지기 시작한 박연폭포에 닿았다. 지금은 개성시 박연리로 돼 있지만 본래 우봉현 (牛峰縣)에 속해 있던 곳이다. 정확하게는 폭포 아래 깊이 파인 소 (沼)가 박연 (朴淵) 인데 중앙은 돌로 만든 독처럼 생겼지만 물이 고인 범위는 상당히 넓다. 소위 지형학자들이 말하는 폭호 (瀑壺.plunge pool)가 이것이다.

겨울이라 물이 줄어 그 양이 평소의 3분의1도 되지 않는다는데 폭포는 쏟아져 내리고 못 물은 시퍼렇게 한기를 돋운다. 이런 곳은 울부짖는 듯한 물소리 때문에 잠시 머물며 관상하는 건 몰라도 장기간 거주할 곳은 못된다는 것이 풍수를 공부하는 나의 느낌이다.

어찌됐든 '조선 삼대폭포' 중 하나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설에 옛날 박진사 (朴進士) 라는 이가 있어 못 위에서 피리를 부니 용녀 (龍女)가 감동해 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바로 옆 조그만 둔덕 위에는 범사정 (泛사亭) 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폭포수의 물보라가 그곳까지 튀어오른다.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마치 샤워장을 연상시킬 정도라 한다.

"용랑 (龍娘) 이 피리에 감동하여 선생에 시집가니/백년을 함께 즐겨 정 (情) 도 흐뭇하리라" 는 백운거사 이규보 (李奎報) 의 시는 바로 이 박연의 전설을 읊은 것이다.

32×69cm

 

폭포 물은 아래로 떨어지나 이어진 물길과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의 장쾌함은 봉황의 비상 (飛翔) 을 연상케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조화속이다. 아래로 떨어지되 위로 솟는 느낌을 주는 우리 폭포는 그래서 상하교접 (上下交接) 의 예로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들이 박연폭포를 보고 지은 시서화 (詩書畵)가 수만에 이를 것이나 여기 와서 직접 한번 보는 것보다 더 큰 감흥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서 간다고 해도 2시간 남짓하면 충분히 닿을 거리 아닌가.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보존 유적 제126호' 다. 북한에서는 '국보 유적' 다음이 '준국보' , 그 다음을 '보존 유적' 이라 한다.

대흥산성은 산성골을 안에 넣고 동북쪽의 성거산과 서북쪽의 청량봉, 서남쪽의 천마산, 동남쪽의 인달봉 등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자연 지세를 적절히 연결해 쌓은 개성 방어의 북쪽 외성 (外城) 이다. 총길이가 10㎞에 이른다.

성 안쪽은 우묵하게 파인 것이 천장지비 (天藏地비) 의 승지 (勝地) 개념에 부합하고 수원이 풍성해 수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과 일본의 국권 침탈기인 한말에도 이곳이 의병투쟁의 근거가 됐었다고 한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 (王建) 의 시조인 성골 장군이 살던 곳이라 하며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구룡산 또는 평나산으로도 기록돼 있으나 지금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북문을 지나면 암벽에 북한의 기념비문이 새겨져 있고 거기서 조금 가다보면 2층 기와의 초대소 건물과 조그만 관리인 숙소가 보이는데 지금은 비어 있는 듯했다. 계속 가면 관음사와 대흥사가 나온다.

돌아 오는 길, 평양 남방 80㎞ 지점에 있는 휴식처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빵.사과와 '룡성맥주' 로 간식을 들었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별들이 마치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빛난다. 불빛이 없고 날씨가 맑은데다가 공기오염이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별똥별도 보았다. 너무 황홀해 별똥을 보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깜빡 잊었다. 나중에 후회해보지만 소용없는 일. 하기야 지금 평양 근교 어느 시골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소원 성취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온 평양거리는 상대적으로 밝고 활기에 차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후8시40분 호텔 도착. 개성을 봤다는 흥분 탓인가 술을 꽤 많이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10] 안악 3호 고분

구월산 가는 길에 벽화로 유명한 '안악3호 무덤' 을 찾아보기로 한다.안악3호 무덤은 평양에서 자동차로 개성 고속도로를 40여분 달려 내려오다 황해북도 사리원 갈림길 (인터체인지) 을 빠져 나와 다시 1시간쯤 서행 (西行) 하다 보면 재령.신천 등을 거쳐 닿게 되는 고구려 왕릉이다.

사리원 갈림길을 나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재령평야는 '나무리벌' 이라는 또다른 이름에 걸맞게 들판이 여간 크고 넓은 게 아니다.'나무리벌' 이란 먹고 남을 만큼 곡식이 풍성하게 나는 너른 들을 일컫는 말인데 그러고 보니 김제.만경을 싸안은 호남벌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안악3호 무덤의 전경. 오랫동안 중국 귀화인 '동수의 묘'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북한의 역사학계는 무덤 주인공이 고국원왕이라는 쪽으로 입장정리를 하고 있다.

오전10시45분 국보유적 제67호인 안악3호 무덤에 닿았다.

안악3호 무덤은 무덤칸의 규모와 그 벽화 내용의 풍부함에서 으뜸가는 고구려 왕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4세기 중엽 고구려에 내투 (內投) 한 중국인 동수 (동壽) 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연구에서 고구려 21대 고국원왕 (故國原王) 의 능임이 새로 밝혀졌다고 한다.남한의 '국사대사전' 에는 고국원왕이 고구려 제16대 왕으로 돼 있는데 21대왕이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대로 한다면 고국원왕은 16대가 되고 21대는 문자왕이다.

고국원왕은 중국 북방민족에게 밀려 수도를 남쪽 환도성 (만주 지안현 퉁구) 으로 옮긴 사실이 있고 재위중 전연 (前燕) 왕 모용황 (慕容)에게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탈취당하는가 하면 어머니와 왕비까지 사로잡히게 한 비운의 왕이었다. 재위 41년 (371년)에는 평양성을 공격해온 백제의 근초고왕과 맞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생을 보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무덤무지 (봉분)' 는 방대형으로 남북 33m, 동서 30m, 높이 6m다. 무덤칸은 돌로 쌓았고 '문칸.앞칸.안칸.동서 두 곁칸.회랑' 등으로 구성돼 있다.입구엔 육중한 돌문 두짝이 달려 있는데 안내원 선생은 "각각의 무게가 9백㎏으로 지금도 여닫힘이 매끄러운 베어링식 문짝" 이라고 설명했다. 벽화는 인물 풍속도로 돌벽 위에 직접 그린 것이다.

 

벽화 중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행렬도인데 주인공이 탄 소수레 앞의 성상번 깃발을 통해 그가 고구려 왕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문칸에는 위병이 서있고 서쪽 곁칸에는 '백라관' 을 쓰고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의 무덤임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는 듯하다.

앞칸에는 호위 병사와 고취대.수박희 (손치기 씨름)가, 그 천장에는 해와 달, 그리고 영생도와 지하 천궁이 그려져 있다. 49년 발굴 당시 안칸에서는 부부로 추정되는 두 사람분의 유골이 출토됐다고 한다. 거기엔 왕이 대신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모습, 동과 남에는 왕비가 시녀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동쪽 곁칸에는 '육곳간 (푸줏간)' 이 그려져 있다. 통돼지.개 같은 가축에 부엌 풍경도 보인다. 우리 일행은 벽화에 그려져 있는 개를 두고 "개냐, 노루냐" 로 잠시 입씨름을 벌였지만 대부분 개라는 데 동의하는 분위기였다.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개를 식용으로도 썼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색채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으며 벽화 중 영화 (永和) 13년이란 글자 때문에 무덤 주인공에 대한 구구한 해석이 있었으나 동수라는 이름의 그는 중국 요동지방 평곽현 경상리 사람으로 벼슬을 살다 69세에 죽었다고 돼 있으며 그가 안칸 문지기 그림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무덤의 주인은 아니라는 게 북한학자들의 주장이다.

리정남선생은 고국원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고국원왕이 재위 41년 동안 줄곧 남진정책을 써 임진강과 예성강을 국경으로 삼았는데 당시 안악지방은 양악이라 해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고국원왕은 지금의 황해남도신원군아양리에 부수도 (副首都) 로 남평양 (南平壤) 을 두고 백제를 공략하다가 전사해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인 듯했다.

지금 안악3호 무덤 주변은 '어로리 (魚蘆里) 벌' 이라는 넓은 '벌방 (들판)' 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 풍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장에서의 내 최초 판단이었다. 한데 안내원의 얘기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과거 지세를 묻다가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안악3호 무덤 뒤 북쪽으로 15m쯤 되는 솔밭 둔덕이 보이고 거기서 3호분까지는 명백히 맥세가 이어져 있다. 즉 산에 기대 터를 잡은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그 둔덕에서 안악 읍내까지는 6㎞ 정도인데 계속 주변 평지보다는 약간 높게 이어지는 어떤 맥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동.서.남쪽은 바다였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무덤은 안악에서 길게 남자의 성기 모양으로 바다로 돌출된 끝 부분, 말하자면 귀두부 (龜頭部)에 터를 잡은 셈이 된다.이는 우리 자생풍수가 즐겨 찾던 자리잡기 방식으로 나로서는 중요한 예를 하나 더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곳이 과연 바다였겠느냐는 점이다.올해 70세인 안내원 위선생은 어렸을 때 동양척식회사가 이곳을 개간했다는 말을 들었고 일부 공사는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완벽한 바다일 수는 없으나 바닷물이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다는 건 현지인의 증언 뿐 아니라 지도상으로도 판단이 가능했다.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은 석당리 수문을 통해 이 지역 관개를 하게 되며 이 일대는 워낙 해발고도가 낮아 과거 저습지였음에 틀림없다.평양에 조성된 은파호나 장수호가 해주만 쪽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흙은 지금도 조금만 파면 갯벌 흙이 나올 정도라는 것이다.

앞의 황개천은 서강과 연결돼 있고 평양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데다 당시는 뱃길까지 가능했으니 남진정책의 거점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동쪽으로 정방산, 북쪽으로 양산대, 서쪽으로 구월산, 남쪽으로 장수산과 수양산이 있는데 모두 해발 9백m 급으로 사방 수호에도 매우 유리하니 금상첨화란 얘기다.자생풍수의 희귀한 예를 안악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11] 이곳이 구월산이로구나

황해도는 비교적 넓은 들판의 땅이다.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 (低平) 은 남포와 은율을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구월산 (九月山) 을 만난다. 들판은 지배층을 상징한다. 평지돌출의 구월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구월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며 구월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마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 (背山臨水) 라는 것이다. 보수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해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그 사이에 속해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25×75cm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는 구월산, 세사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벽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의 궁합을 이뤘음을 보여줌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자생풍수는 양생수기 (養生修己) 의 소박한 자연주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구월산은 저항의 맥이 흐르는 한편으로 단군신화가 살아 숨쉬는 기묘한 민족주의적 특성을 가진 산이다. 이제 그 구월산을 찾아가는 길이다.

안악군 월정리에 접어드니 구월산 전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불꽃같은 석봉들이 능선에 즐비한데 최고봉이 1천m에 채 못미치는데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아마도 평지돌출의 산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산이 마치 안악군을 휘감 듯 둘러치고 있어 옛말대로 안악이란 지명이 '구월산 안자락' 에서 유래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구월산 자체가 서해의 바닷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병풍의 긴 성처럼 안악.신천.재령 일대를 감싸주는 형세는 그것이 꼭 단군과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주민들의 존숭 대상이 됐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형세가 단군신화를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구월산이란 이름도 단군신화와 곧바로 연결이 된다. 구월산의 구는 우리 말로 아홉이고 월은 달이니 아달산, 즉 아사달산이 한자로 뒤집어져서 그런 이름이 나왔으리라는 것이다.

1994년 북한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월산 전설 (1)' 에 보면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 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그건 그렇고 구월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4대 명산에 대한 서산대사 휴정의 품평이다.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빼어나지 못하다.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못하고 웅장하지도 못한데, 묘향산은 빼어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구나 (金剛秀而不壯/智異壯而不秀/九月不秀不壯/妙香亦秀亦壯)."

비록 불수부장 (不秀不壯) 이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것이 구월산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대 명산 중 그렇다는 것이니 그 규모가 넷 중 가장 작고 높이도 그러하거니와 석골 (石骨) 이 드러난 악산이라 그런 표현을 쓴 것이지 구월산이 4대 명산의 반열에 드는 산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놓고 있지 않은가.

서해를 향해 뻗어간 넓은 벌판 끝자락에 돌출(突出)해 있는 구월산. 마치 바닷바람을 등지고 우뚝 서서 안악․산천․재령 일대를 품안에 감싸안고 있는 병풍과도 같은 모습이다.

 

안악군 월정리에서 바라 본 구월산은 단군의 혼이 깃들인 민족신화의 산답게 긴 능선을 따라 불꽃처럼 석봉(石峰)들이 이어지면서 장엄함을 더해 준다.

'동국여지승람' 이나 '택리지' 의 구월산 소개도 들어둘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아우른 것이 육당 최남선 (崔南善) 의 글이 아닌가 한다.

육당에 따르면 단군이 하늘에서 맨 처음 내려 온 곳은 묘향산이다.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을 평양에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구월산 아래 당장평 (唐莊坪. '여지승람' 에는 唐莊京으로 나오고 현지에서는 唐莊坪이라 함) 으로 옮겨 모두 1천5백년 동안 인간을 다스렸다.

마지막으로 구월산에 들어가 신령이 됐는데, 따라서 단군을 모시는 산도 묘향산에서 점차 구월산으로 옮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신천.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 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 봉우리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일출봉.광봉.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산이 구월산이다."

육당의 표현이다. 정상인 사황봉 (思皇峰) 엔 모종의 시설물이 있는 듯해 이번에 오르지 못했다. 그 등성이에 있는 구월산성까지는 가 보았는데 아마도 해발 9백30m쯤 되지 않았나 싶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들판이 펼쳐지고 서쪽으로 희미하기는 하지만 서해가 바라보이며 북쪽으로는 서해 갑문에 호수가 된 대동강 하구 (예전에는 이를 제량바다라 했다) 를 바라볼 수 있으니 그 장쾌함은 내가 본 어떤 산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구월산은 유적 많고, 전설 많고, 꽃이 많아 삼다 (三多) 의 산이라 불린다. 특히 꽃 중에는 장미.두견화.나리꽃이 유명하다는데 계절이 겨울이라 얘기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무척 아쉽다. 구월산의 풍취는 "아사봉 천궁에 귀를 기울여 보고, 단군대에 올라 천신의 유적도 더듬어 보고, 월산폭포에 몸을 씻고, 덕바위 위에서 사슴고기를 구우며 구월산 영지술에 취해보는 것" 이라 했지만 그 또한 침 흘리며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구월산 아흔아홉 봉우리 중 남쪽 끝자락, 그러니까 지금의 황해남도 삼천군 고현리에 사람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의 입구지봉이란 봉우리가 있다.

그런데 구월산 동쪽 들판 지역인 안악.삼천.신천.문화 고을 사람들은 농사만 지으며 살아왔으므로 수삼파령을 넘어 율천 (지금의 은율) 고을에 곡식을 내다 팔고 대신 그곳에서 물고기와 소금.농기구 따위를 사오곤 했다. 그러니 율천이 잘 살고 들판 사람들이 못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터이다.

어느 해 노인 풍수쟁이가 이곳에 들렀다가 영리한 황부자집 며느리의 말을 듣고 그 이유를 구월산 입구지봉에 돌려댔으니, "저 봉우리가 사람 입 모양을 하고 신천.안악.문화 고을을 향하고 앉았는데 먹기는 이쪽 것을 먹고 뒤 (대변) 는 은율을 보고 하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혀를 잘라버리면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 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풍수의 말을 따랐더니 과연 그리 됐더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은 안악 쪽이 은율 쪽보다 좀 더 풍요로워 보이더라는 것인데, 기분탓인가, 아니면 그 얘기를 들어서인가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구월산 동쪽은 유정 (有情) 한데 서쪽은 좀 음울한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12] 구월산 월정사

구월산은 그 끝이 빙돌아 처음 봉우리를 되돌아 보는 모양이라 하여 회룡고조형 (回龍顧祖形) 이라 일컫는다. 간혹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대단한 풍수 길지의 대명사인 것처럼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선 구월산이 과연 그러냐 하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산경표 (山經表)' 에서 구월산이 속한 해서정맥 (海西正脈) 을 보면 산맥이 둥그렇게 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지세는 소위 풍수 용어로 '명당 규국 (規局) 이 관광 (寬廣)치 못한' 흠이 있기 때문에 크게 중시하지는 않는다.

구월산 아사봉의 동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월정사는 이름 그대로라면 '달의 정수를 모은 절'. 그 음기로 양인 구월산의 세찬 기력을 눌러보자는 의도에서 지어진 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통일신라기인 9세기 월정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17세기 중엽에 중수됐으며 전형적인 조선조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오후1시 구월산 초입에 있는 '국보 유적 제75호' 인 안악 월정사 (月精寺)에 도착해 절부터 감상한다.

주전 (主殿) 은 극락보전 (極樂寶殿) 으로 두공을 다른 절과는 달리 바깥 7포, 안 5포로 하여 안쪽을 낮게 하고 바깥쪽을 높이 짜올린 데 특징이 있다고 한다. 맞은편에는 월정사 현판이 부착된 만세루 (萬歲樓)가 있고 왼쪽에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冥府殿) 이, 오른쪽에는 수미산 밝은 달이 못에 잠겼다는 의미로 수월당 (水月堂) 이라 이름 한 승려들의 공부방이 있다.

극락보전은 배부른 기둥이고 집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고색창연한 느낌을 준다. 주불은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닫집이 매우 고전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다.

만세루의 천정화는 불화가 아니라 속세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수월당은 소란반자 천장인데 연꽃잎마다 불경을 새겼다. 뜰 안 두 곳에 있는 당간지주는 깨진 탓에 오히려 옛 멋을 더하는 듯하여 나같은 음성 (陰性) 취향 사람에게는 아늑함을 준다.

그러나 월정사 터잡기는 보통 강렬한 것이 아니다. 월정사는 그 좌향과 절 이름이 자생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굳이 원한다면 남향을 고집할 수 있는 환경인데도 산세의 흐름을 따라 동남향을 취한 것이 그런 예다. 가뭄인데도 계류 흐르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개성 송악산을 '여성의 산' 이라고 표현한 안내원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구월산은 남성의 전형이다. 그 기운이 너무 강해 양기탱천 (陽氣撑天) 이란 표현을 써도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산에 오르기 전 일행에게 농담삼아 "이 산은 양기가 너무 강해 마주 대하고 소변을 보면 산의 양기에 눌려 자신의 양기가 소진될 것이므로 조심하라" 는 말을 했더니 모두가 그걸 농담으로만 듣는 것 같지 않다.

나 역시 웃자고 한 소리만은 아니다. "산에 등을 돌리고 일을 보아야 항문으로 양기가 들어가 몸에 좋다는 뜻" 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나는 구월산이 두려웠다. 그 세찬 기력을 받아내기에 나는 너무 대가 약한 사람인 까닭이다.

구월산의 잔설에 조사단 버스가 미끄러지자 북한 군인들이 달려와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이 월정사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이란 음 (陰) 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정수 (精粹) 만을 골라 월정사라 하였으니 음양상보 (陰陽相補) 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은 초보적인 해석일 터이고 실은 월정으로 탱천하는 양기를 눌러보자는 의도가 분명 있었으리란 짐작이다.

그러면서도 조안 (朝案) 방향, 그러니까 절의 앞쪽은 비좁게 좌우 여러 겹으로 둘러싸였는데 (환포) 의외로 절 뒤편, 그러니까 절의 터 (穴) 를 만들기 위해 내려와야 할 내룡 (來龍) 의 맥세 (脈勢) 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쉽게 말해 절 뒤편, 정확히는 절 뒤편 오른쪽이 오히려 함몰 (陷沒) 돼 있고 앞쪽이 옷섶을 여민 듯 꼼꼼하더라는 뜻이다. 이는 뒤로 산에 기대어 앞을 조망한다는 중국식 이론풍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터잡기가 된다.

극락보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삼형제봉.아사봉.달기봉은 거의 연봉 형식이다. 따라서 멀리서 보면 마치 기다랗고 평평한 능선처럼 보일 형상이다. 그런데 달기봉에서 능선이 뚝 떨어졌다가 극락보전 오른쪽으로 촛대봉이 우뚝 솟았으니 마치 일부러 절 뒤를 우묵하게 파놓은 듯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우묵한 곳이 구월산의 최대 허결처 (虛缺處.기운이 허한 곳) 이고 그 곳을 비보 (婢補) 하기 위해 절을 세우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게 현장에서의 내 생각이었다. 실제로 안악에서 들어오다 보면 월정사 있는 부분이 구월산 주 능선을 기준으로 푹 꺼져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절 뜰에서 바라보는 아사봉은 뾰족하다. 그러나 전체를 조망하면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월정사 관리인으로 있다는 길선생은 아사봉부터는 계속 단군얘기로 관심을 돌린다. 단군이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자리, 그의 발자국 자취, 물 마시던 곳에 이어 구월산 아래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구월산 저수지와 안악군 '룡산리' 일대가 단군이 평양에서 도읍을 옮겨온 당장평 (唐莊坪) 이란 얘기에 이르기까지 '드디어 내 전공을 만났다' 는 식이다.

구월리에서 월정사까지는 시멘트로 곱게 포장돼 있는 운치있는 길이다. 그러나 절 입구로 갈리는 곳에서 절까지는 잘 다듬어놓긴 했어도 비포장길이었다. 우리는 차로 올라갔지만 당연히 차량 통행이 금지돼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한다. 요즈음 절에 가보면 심산유곡임에도 불구하고 사천왕문까지 그대로 차들이 들락거리지 않는가. 월정사에는 수도하는 승려가 없다. 그런데도 배려가 그와 같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제 구월산 정상으로 향한다. 중턱에 무슨 기념비 제막식으로 1천명은 족히 넘어보이는 인원이 집결해 있었다. 산 속에 집단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남쪽에서도 본 일이 없어 신기하기도 하고 흥분도 된다. 다행히 날이 춥지 않아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산꼭대기 조금 못미쳐 드디어 말썽이 생기고 말았다.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구월산을 두고 '양기탱천' 이란 말을 썼지만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유영구 차장이 "선생님, 구월산이 양기탱천을 넘어 분기탱천한 산은 아닙니까?" 했을 정도로 당시 뒤로 미끄러지는 차 사고에 놀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 '인민군' 십수명이 달려들어 차를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나이가 좀 든 듯한 중대장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열심히 도와주었다. '인민군' 현역대위와 예비역이지만 국군 대위 출신인 내가 구월산에서 웃는 낯으로 만났다 (?) .인연의 공교로움 탓인지 더 고마운 마음이 솟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정상 바로 아래 구월산성에서 먹은 '곽밥 (도시락)' 이 별미일 수밖에 없다. 안내원 길선생이 또 단군 얘기를 꺼낸다.

우리 말에 고수레 혹은 고시래라는 말이 있는데 알다시피 이 말은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귀신에게 바치는 일종의 우리식 관습이다. 그 관습이 바로 단군의 신하로 백성들에게 처음 농사를 가르친 고시 (高矢) 란 사람을 기려 나온 것이란 얘기였다. 그래서 고수레를 할 때는 고기는 전혀 쓰지 않고 반드시 곡식만 써야 한다는 주의도 덧붙였다.

[13] 정방산성

12월24일 오전9시30분 평양을 출발한 지 꼭 1시간만에 정방산성 (正方山城) 남문에 도착했다.사람들은 흔히 황해도 봉산 (鳳山) 의 정방산이라 일컫지만 소재지는 황해북도사리원시광성리다.

오늘은 날씨가 좀 쌀쌀하다. 우리가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하니 '안내원 선생' 이 "외국인도 안내하는데 같은 핏줄의 형제를 기다리는 일이라 오히려 즐겁습니다" 고 맞받는다.

 

정방산성을 오르는 노정은 남문에서 시작된다. 남문으로 들어가는 도로 옆으로는 수삼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성벽은 납작하게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남문 주변은 10m가 넘고 평균 5~6m정도 높이다. 남문을 들어서면 오랜 풍화작용으로 생긴 1백m 이상의 높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이 저연못․약수터 등과 어우러져 수려한 풍치를 뽐내고 있는 정방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말에 덕담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남문을 향하는데 유리상자 안에 든 벤치가 하나 보인다.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현장에 왔을 때 앉았던 의자' 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성불사 안내원이어서인가 올라가며 하는 설명에 자랑이 늘어진다.

"이곳 정방산은 봄에는 꽃, 여름에는 그늘경치,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라 어느 때 보아도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수령님께서는 인민의 휴식처로 꾸미도록 교시하셨습니다. " 정말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구월산에서 받은 강한 지기 (地氣) 의 느낌에 비해 이곳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성문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삼나무가 심어져 있다. 현재 북한의 국화로 돼 있는 '목란꽃' 도 이곳에서 자생하는 것을 찾아낸 것이라 한다. 그림으로는 보았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그런 꽃 이름이 남한 사전에는 나오지 않았다.

살구꽃도 유명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꽃 구경할 계절은 아니다. 월정사처럼 이곳 성불사에도 스님은 없고 40년 경력의 관리인이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남문을 둘러싼 성의 윤곽이 한눈에 잡힌다. 성벽은 납작하게 대충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평균 5~6m 정도의 높이고 남문 부근만은 10m가 넘는다.

정방산 계곡의 움푹 들어간 모습 (凹形) 이 뒤에 배경으로 잡히고 남문과 높은 성벽이 튀어나온 형태 (凸形) 를 취하니 우리나라 산성에서 흔히 보는 자연과 인공의 음양 조화를 여기서도 본다. 정방산은 정말 기묘한 산형 (山形) 을 가진 산이다.

기봉산 혹은 깃대봉 (안내원은 봉화를 올리던 산이라 하여 이렇게 불렀으나 기록에는 천성봉이라 돼 있다) 을 정상으로 해 모자산.노적봉.대각산이 사각형 모양으로 솟아 있기 때문에 정방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한가운데는 약물산이 있어 정방산 안쪽 분지인 정방골의 중심을 잡아준다.

땅을 보는 옛사람들의 안목이 요컨대 이런 정도다.산성은 그 능선을 따라 12㎞의 길이로 뻗어 있다. 남문 위에 세워져 있는 남문루는 '국보 유적 제88호' 로 단층짜리 문루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라 한다. 문루에 올라서면 정방산 능선이 잘 들어온다.

남문의 '무지개 문길' 은 버스가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남문을 지나자면 길가에 '국보 유적 제90호' 인 '성장김공성업영세불망비 (城將金公成業永世不忘碑)' 가 서 있다.

68x31cm

 

성장은 7품관이었다고 하는데 김성업 (金成業) 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다. 거기다 그 비석이 왜 국보급으로 지정돼 있는지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성안과 밖의 기온은 1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성안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어쨌든 지금이 겨울인데도 따뜻한 것만은 사실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이곳이 수풍호가 있는 평안북도 창성군과 함께 북한에서 산소 밀도가 가장 높으며 공기 중 인체에 이로운 물질들이 가장 많이 섞여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이곳의 공기가 좋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겠다.

정방산성은 물이 풍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못이 4개고 우물이 7개인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름철 장마 때 사방 산에서 쏟아지는 물은 성문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본래 성문 양 옆에 수구문 (水口門) 이 있었는데 언제나 비가 오면 성문 자체가 물길이 돼버려 1977년 더 큰 '물구멍' 을 수문 옆에 다시 뚫어놓았다. 성문을 지나 오른쪽 약물산 중턱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의 바위 위를 보면 크지 않은 돌탑이 보인다.

이것은 성을 만들 때 공사하다 죽은 사람 한명당 하나씩 돌을 얹어 만든 것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이 산성이 완성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그래서 본래 탑 이름이 '원한탑' 이었는데 '金주석' 의 교시로 '승리탑' 으로 개명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북쪽으로 약8km 떨어져 있는 정방산은 높이 4백81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경치가 아름답고 고적들이 많은 명승지다. 산마루들이 서로 잇닿아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고 해 정방산이라 불린다. 산마루에는 고려시기에 쌓고 조선시대에 보강 중축한 정방산성(둘레 12km)의 윤곽이 확연하게 남아있다.

계속 들어가면 4㎞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와 인공폭포를 만들고 1만㎡의 못을 조성해 잉어와 초어를 기르는 유원지 비슷한 곳이 나온다. 그 위로 좀 더 가면 잘 지은 휴게소 건물도 있다.

내 보기에 정방산은 풍수 형세론상 종을 엎어놓은 형국의 금성 (金星) 이던데 아니나 다를까 이 산을 주위에서는 할아버지산이라 부르고 마흔개가 넘던 절들을 할아버지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행 (五行)에서 금 (金) 은 방위로는 서쪽, 색깔로는 흰색이고 계절로는 가을이니 할아버지산이란 표현이 풍수와 다른 것이 아닌 셈이다.

이윽고 '국보 유적 제87호' 성불사 (成佛寺)에 닿았다. 충청남도 천안시 신안동 태조산에도 도선국사가 창건한 성불사가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불사는 당연히 이곳 정방산 성불사다.

신라 효공왕 2년 (898)에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돼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이 해에 도선국사는 입적했고 입적 전에 그는 전남 광양 옥룡사에 계속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충청과 황해에서 불사를 했다고는 볼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의 제자나, 아니면 도선의 풍수 맥을 이어받은 누군가에 의해 창건된 것은 분명할 것이니 도선 풍수의 냄새를 맡는데도 지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는 궁예가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이기도 하다.

그것과도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은 들지만 그 점은 여기서 설명을 생략한다. 이제 성불사로 들어가 보자.

[14] 성불사(上)

남쪽에서 도선국사 (道詵國師) 의 자생풍수 자취를 찾아온지 여러 해가 됐는데 오늘 정방산 성불사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한겨울이지만 구름 한점 없는 초봄과도 같은 날씨다.

성불사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사적을 알아야 한다. 다행히 성불사에는 입구에 영조 3년 (1727)에 세워진 '보존 유적 제1127호' 성불사 기적비가 있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준다.

물론 시대가 너무 차이가 나서 믿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안내하는 리정남선생의 도움으로 얻은 기적비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방산 앞으로는 큰 파도 일렁이는 바다가 서있고 뒤에는 겹겹이 막아선 묏부리를 끼고 있어 한 사나이가 있어 길목을 막아선다면 만명의 장부도 길을 열 수 없는 곳이다.

정방산 성불사는 평양․사리원 주민의 봄․가을 야유회 명소로 인기있는 장소다.

 

성불사란 이름은 사람의 성품을 처음으로 돌린다는 뜻이고 절이 기대고 있는 천성산이란 이름은 인물이 많이 난다는 뜻이다. 옛날 도선국사가 절을 세울 때 산이 솟고 물이 흐르는 형세와 나라의 방위상 중요 지점의 형편을 밝은 안목으로 살펴 가려내 천만년을 지켜나갈 고장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절간을 세워 경문이나 외고 중들이 살아가는 데 그치게 하였으랴. 훗날 나옹화상이 세운 전각은 우람하고 찬란하여 옛 일을 똑똑히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절간은 무너지고 남은 것은 이제 한 둘에 지나지 않으니 만물의 성쇠가 애당초 그 운수인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주시할 대목은 절 입지가 단지 승려들의 명당 터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방과 주민의 살림을 생각함에 있음을 밝힌 곳이다.자생풍수가 좋은 터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의 병든 어머니를 대할 때 환처 (患處) 에 침이나 뜸을 놓아드리듯 병든 터, 흠 있는 땅을 골라 거기에 절이나 탑을 쌓아 고침으로써 국토를 밝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란 주장을 상기하면 그 대목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절은 청풍루를 정문으로 삼았는데 들어서면 본전 건물인 극락전이 앞을 막는다. 남향으로 정면 3간에 측면 2간인 맞배집이다.

성불사 주변 산세 개념도

 

사실 성불사 본전 건물이 남향을 한 것은 이론상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주위 산세를 살펴보면 뭔가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 뒤, 그러니까 주산에 해당되는 기봉산은 정방산의 최정상이라고는 하나 그 생김새가 수려하지 못해 흔히 절을 의지할만한 산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그러하다. 거기다 본전 건물을 서향 (西向) 으로 앉혀 응진전 뒷산을 등지게 한다면 기가 막힌 명산형 (名山形) 을 주산으로 갖게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피했다는 점이다.

극락전이 마주하고 있는 약물산은 더욱 문제가 많다. 배치로 보아 약물산은 성불사의 안산 (案山)에 해당된다.

모름지기 안산은 주산을 압도하거나 살기를 띠는 것을 극히 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물산 산세는 한 번 보기에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인데다 산의 북사면 (北斜面) 을 절을 향해 내보이고 있기 때문에 조명 또한 음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평범한 기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금기 (禁忌) 시해야 할 약물산을 안산으로 삼았을까. 그 대답이 바로 자생풍수에 있다. 이미 앞에서 밝힌 얘기지만 자생풍수에서는 땅을 어머니로 여긴다.

정방산 4개 산봉우리 속에 안기듯 자리잡은 성불사.

 

곱고 부드러운 풍광이 그 스스로 한 폭의 수목 산수화였다. 68x34cm

그렇다면 우리 풍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땅의 상대는 사람이다.

사람과 땅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선의 자생풍수에서는 땅 못지 않게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을 모르고 땅을 볼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훌륭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다.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지고지선한 사랑이란 상대가 다른 것에 비해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일 때 의미가 있다.

우리 풍수에서 땅 사랑은 이런 근본적인 인식 속에서 출발한다. 명당이니, 승지 (勝地) 니, 발복 (發福) 의 길지 (吉地) 니 하는 것은 우리 풍수의 본질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개념들이다.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 도선풍수가 가고자 하는 목표다. 그것이 바로 비보 (裨補) 풍수이기도 하다.

도선풍수는 땅을 어머니와 일치시킨다. 어머니인 땅이다. 그 어머니의 품안이 우리의 삶터가 된다.

만약 어머니의 품안이 유정하며 전혀 문제가 없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본 같은 경우라면 어느 자식이 효도를 마다할 것인가. 그것은 효도도 아니고 당연한 되갚음의 의미밖에는 안될지도 모른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애틋한 노랫말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던 성불사 그 절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절을 지키던 주승도 오래전 열반에 들고 객(客)을 잠 못들게 하던 '그윽한 풍경소리' 마저 사라진채 집채처마 끝엔 종 하나만이 덩그렇게 매달려 있다.

좋은 어머니는 그 자체로서 완벽 지향적이고, 따라서 이상형이다. 그러나 현실에 완벽이라든가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어머니라도 얼마만큼의 문제는 지니고 있는 법이다. 피곤하실 수도 있고, 병에 걸리셨을 수도 있으며 화가 나 계실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어머니의 품안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 풍수는 바로 그런 완벽하지 못한 어머니, 우리 국토를 사랑하자는 땅에 관한 지혜다.

성불사의 입지 (立地) 또한 예사롭지 않다.성불사는 정방형의 가운데 쯤 위치하기 때문에 큰 비가 오면 물이 모여드는 곳이 된다.

침수의 위험이 매우 큰 곳이란 뜻이다. 거기서 모인 물이 길을 따라 남문으로 빠져 나가게 된다.

그래서 남문에 물길을 두 개나 다시 뚫은 것이었다.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이론풍수가 아니고 자생풍수가 있었음을 받아들이고 성불사의 풍수를 그에 입각해 이해한다면, 성불사가 왜 그런 입지와 좌향을 택했는지는 자명해지는 일이 아닌가.

이미 지나 온 구월산과 정방산이 비교된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 이런 풍수 속담을 만들어 봤다.

"굳센 아들을 낳으려면 구월산으로 가고, 예쁜 딸을 낳으려면 정방산으로 가라. " 정방산 정상에 서면 구월산과 바다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중턱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했다. 물이 맑고 공기가 좋아서이리라.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몰려오는 시간에 산을 오르는데도 피곤함이 없고 숨찬 기운이 금방 가신다.

산 기운은 온화 유순하고 사람들 또한 그러하니 과시 천하의 승지라 한들 시비 걸 사람이 없을 것이다.당연히 이곳에 있으면 마음도 편안하게 되는 법이니 깊은 시름 있는 이들은 모름지기 정방산 성불사를 찾기를 권한다.

[15] 성불사(下)

성불사가 자생풍수에 따라 입지와 좌향을 택한 전형적인 사례임은 이미 언급했다. 성불사의 자생풍수적 조건 중에서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 응진전이 바로 그것이다.

부속건물이면서도 본전인 극락전보다 몸채가 더 큰 응진전은 뒤에 수려한 산을 배경으로 삼고 살기 띤 약물산을 피해 서향 (西向) 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모자산과 노적봉이 둥드럼한 봉우리를 드러내니 이는 유정한 산세다. 바로 이론풍수에 딱 들어맞는 좋은 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터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본전인 극락전을 거기에 들였어야 하지 않은가.

 

성불사는 기봉산․모자산․노적봉․대각산을 네모지게 잇는 정방산 속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 입지나 좌향이 이론을 아랑곳 않는 자생풍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성불사가 자생풍수에 따라 지어진 절이기 때문이다. 여러차례 되풀이 하는 말이지만 자생풍수는 병든 어머니부터 고쳐야 한다. 그래서 대웅전격인 극락전을 병든 터에 자리잡게 하고 실제로 땅 기운이 좋은 소위 명당 길지와 좋은 좌향으로는 응진전을 앉힌 것이다.

극락전 뒤에는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다. 산신각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신선이 동자와 호랑이를 거느리고 앉아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당연한 일이다. 호랑이는 산신이니까 의당 산신각에 있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에 등장하는 호랑이 얘기는 모두 이곳을 무대로 한 것이라 한다. 뒷봉에서 호랑이 새끼 두마리를 잡은 곳이 지금도 남아 있고 임꺽정의 수하로 봉산 태생인 배돌석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곳도 이곳이라 한다. 물론 임꺽정 얘기는 나중에 구월산으로 옮겨 가는 것이지만.

1953년 성불사의 마지막 주지 스님이 99세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속세로 보자면 굉장한 장수 (長壽) 다. 부근 주민들도 대개 오래 수를 누리는 편이며, 특히 여인들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아름답게 생긴 '녀성 안내원 리선생' 은 "물 맑고 공기 좋아 인물이 곱고 장수한다" 고 자랑이다. 앞서 평북 창성과 함께 이곳 공기가 좋다는 얘기를 한 바 있거니와 약물산에서 나오는 약물이 또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불사의 정문 구실을 하는 청풍루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고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본전인 극락전이 마치 사람의 앞을 가로막듯 남향의 전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경내 한가운데 선 이끼 낀 석탑은 아담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긴다. 32X18cm

 

약물은 굴 속에서 나오는데 저녁나절 해질 무렵에만 잠깐 볕이 든다고 한다. 이때 해가 든 풍광이 금색이라 금수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안내원은 이 샘이 "한편으로 '인민' 들에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염원을 심어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는 설명을 곁들인다.

성불사가 자리잡고 있는 정방산 안에는 무덤을 쓰지 못한다고 한다. 워낙 양명한 산이라 시신의 음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 터인데, 누군가 욕심을 품고 밀장 (密葬) 을 하면 반드시 가뭄이나 홍수가 져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엔 황주와 봉산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반드시 그 밀장 터를 찾아내고 시신을 훼손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밀장 방비 설화의 정형이다.

점심은 정방산 찻집에서 금수정 약샘물에 '곽밥' 으로 때우고 오랜만의 여유시간을 갖는다. 마침 황창배 화백이 그림을 그리고 있어 내게도 시간이 난 것이다.

성불사 아래 야외휴식터. 돌 책상과 돌 의자에 앉아 그간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는 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산새소리 명랑하고 다들 어디로 갔는지 인적도 끊겼다. 홀로 신선의 마음이 돼 앉아 있자니 다른 일행에게는 얼마쯤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전날 구월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북한이 자랑하는 서해갑문을 지났다. 86년 6월 완공된 서해갑문은 너비 14m, 길이 8km의 방조제다. 37X24cm

 

내가 처음 초봄같다고 했던가. 이제는 또 초추 (初秋) 의 양광 (陽光) 이란 표현이 떠오른다. 어찌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이다지도 맑은가. 문득 내 자신 속세를 떠나 구도 길에 오른 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유명한 '성불사의 밤' 이란 노래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깊은 밤도 아니고 처마끝에 매달려 '그윽한 소리' 를 들려주던 풍경도 없다. 마지막 주승 (主僧) 이 세상을 떠난 것도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다. 그래도 객 (客) 은 여기 잠깐이나마 홀로 앉아 정방산과 성불사, 그 자연과 인공이 뿜어내는 거대한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인가.

사실 풍수는 터와 그 주변 산하가 내는 소리를 듣는 우리 민족 고유의 지혜다. 그 터에 의지해 살아갔던, 이제는 사라져 간 사람들의 무언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것이 들려야 풍수를 했다 할 수 있고 자연의 진정한 모습도 보게 되는 것이다. 아, 정방산이여, 성불사여. 나는 지금 너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는가.

내 어느 날 부모님 모시고 식솔들 챙겨 이 산에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어머님은 몰라도 아내와 자식들은 반드시 그럴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야 내 마음의 미안함도 가실 것이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불사의 새소리와 물맛, 시원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겠는가. 그들은 알고 있으리라. 이 산하의 명미한 풍광을. 다만 오지 못함을 통탄할 뿐. 마음들은 다 이곳을 찾아 산 속의 부드러운 흙을 밟고 있으리라.

오후도 느지막한 시간이 됐다. 떠나자는 소리가 들린다. 3시50분 성불사를 출발한다. 대동강 평천나루에 꽤 큰 배가 세 척 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짐을 들고 기다린다. 아마도 서해갑문 (閘門) 쪽으로 가는 연락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보다. 남포와 평양 사이에는 서해갑문으로 생긴 호수를 이용해 정기선과 화물선이 다닌다고 한다.

전날 보니 서해갑문에서 가까운 대진나루와 와우도에는 제법 많은 배들이 정박 중이었다. 이 배들은 쑥섬 건너 평천나루까지 들어간다고 하니 수운 (水運) 은 편리한 편이다. 1천t 이상의 큰 배들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한강 하구가 개방된다면 서울도 그럴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시간이 채 못돼 평양에 도착한다. 갈 때보다 빨리 왔다. 호텔 방에 들어와서도 성불사가 안겨준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대동강 냉장고' 를 열어보니 신덕샘물.룡성맥주.룡성배사이다.코카콜라.양주샘플.중국제 과일캔 등이 들어 있다. '진달래 텔레비전' 에서는 여자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소리는 꾀꼬리같이 아름다우나 왠지 애상 (哀傷) 이 깔려있다. 본래 아름다움은 애상을 띠는 법인지도 모른다.

종종 너무 아름다워 슬픔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16] 평양의 主山 금수산

12월16일. 평양의 첫날밤을 돌아보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북녘땅에 첫발을 내디딘 흥분과 긴장감, 베이징 (北京) 을 에돌아 온 피로에 못이겨 정신없이 잠만 자는 것으로 그 밤을 넘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내가 평양답사에 '서둔다' 는 느낌을 줄 정도로 열심이었던 데는 그런 아쉬움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했던 탓도 있을 것 같다.

평양은 북성 (北城).내성 (內城).중성 (中城).외성 (外城) 등 모두 네개의 성으로 구성돼 있다. 북성은 금수산 (錦繡山) 의 최고봉인 최승대 (最勝臺) 를 정점으로 해 을밀대 (乙密臺) 와 모란봉 (牡丹峰).부벽루 (浮碧樓).청류정 (淸流亭) 등을 잇고 있는 아주 좁은 범위의 성이다. 금수산은 최승대와 을밀대.모란봉 연봉을 통칭하는 지명인데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라 한다.

 

주체탑에 오르면 평양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옥류교(앞)과 능라다리(뒤)가 푸른 물 위에 시리게 떠 있고, 강건너편 옥류교 바로 밑으론 연광정과 대동문의 지붕이 아련하다. 능라다리 위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이 평양의 정원(廷園)이라 불리는 금수산 모란봉이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서남쪽으로 칠성문 (七星門).조선혁명박물관.만수대의사당 등을 거쳐 내려오다가 인민대학습당 자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동강을 만난 뒤 그 상류인 북쪽으로 올라가며 대동문 (大同門) 과 연광정 (練光亭) 을 거쳐 다시 을밀대로 합류하는 구조로 돼 있다.

이곳은 지금도 그 한 가운데에 김일성광장과 정부종합청사를 껴안고 있는 평양의 중핵지 (中核地) 라 할 수 있다.

중성은 만수대의사당 부근에서 서쪽으로 나와 보통문을 거친 뒤 보통강 흐름을 따라 남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평양 중남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창광산 (蒼光山) 과 서기산 (瑞氣山.현재는 해방산) 을 왼쪽으로 끼고 대동강변에 이르는 성이다.

그리고 창광산과 서기산의 남쪽 전체, 즉 대동강과 보통강이 가로 막듯이 싸안고 있는 오늘의 평양시 평천구역이 외성에 해당된다. 이렇듯 성을 네겹이나 쌓으면서까지 평양을 중시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곳이 지리적 요충이기 때문이다.

성호 (星湖) 이익 (李瀷) 의 말을 빌리면 평양이 있는 서관 (西關.관서지방) 은 조선의 3대 왕조 (단군조선.기자조선.고구려) 터로 산물이 풍성하고 주민이 많은 땅의 중심이다.

특히 평양은 관서 유일의 중진 (重鎭) 이며 경승 또한 천하 제일이니 산을 머리에 베고 강으로 띠를 두른 곳 (枕山帶水.명당을 지칭하는 풍수용어) , 둔덕을 짊어지고 물을 끼고 있는 땅 (負岡臨水.역시 명당을 가리키는 말) 이다.

정말 그런가.

 

평양은 금수산을 주산 (主山) 현무 (玄武) 로 삼는다. '동국여지승람' 에서는 이 산을 진산 (鎭山) 으로 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여지승람' 전체가 고을의 주된 의지처를 모두 진산이라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풍수적으로는 주산 현무가 올바른 표현법이다.

주산이란 마을이나 고을의 모체적 상징성을 띠는 곳으로 그 고장 출신 사람들에게는 고향 혹은 어머니의 대명사와 같은 산이다. 그러니 평양 사람들이 모란봉.을밀대.금수산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운무 자욱한 날씨 속에 단군과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숭령전 (崇靈殿) , 고려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숭인전 (崇仁殿) 을 지나 모란봉예술극장 아래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1948년 '남북 연석회의' 장소로 쓰였다는 모란봉예술극장은 다행히 전쟁의 재해를 거의 입지 않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치 어릴 때 몇번 가 본 적이 있는 서울 명동의 시공관 (전 국립극장) 건물을 보는 느낌인데 규모는 그보다 큰 편이다.

바로 그 뒤가 평양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이다. 칠성문이 북두칠성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우리 전래의 칠성신앙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칠성문은 을밀대와 만수대를 잇는 산등성이에 있는데 특별히 이론풍수적 원칙, 다시 말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풍수원리를 따른다거나 좌향 역시 정북이니 정동이니 하는 형식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세의 흐름에 내맡겨 건물을 세웠다. 우리 자생풍수 (自生風水) 의 영향을 여기서도 본다. 성곽도 따로 옹성 (甕城) 을 쌓지 않고 성벽 그 자체를 성문 바깥 쪽으로 둥글게 내둘러 쌓아 놓았다.

이 또한 중국성곽 축조의 전형을 따르지 않고 풍토에 적응코자 했던 우리식 성 쌓기의 한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성문 아래에는 아직도 고구려 축성 양식 그대로인 돌담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로서의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밑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철옹성 (鐵瓮城) 바로 그것인양 웅장하고 위압적이다.

다시 을밀대를 바라보며 산을 오르는데 음산한 날씨에 까마귀까지 울어댄다. 기분을 풀 양으로 내가 "까마귀가 보신에 좋아 남녘에서는 한마리에 30만원까지 받고 팔린 적이 있답니다" 하니 안내하던 리선생이 내 말을 받아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를 해준다.

"까마귀에는 열물 (熱水) 이란 내장기관이 달려 있습니다. 까마귀가 태양의 상징이 된 건 이것 때문인데 사람 몸에도 역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까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열물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잡으려면 반드시 해뜨기 직전, 그들이 동작에 들어가기 전에 포획해야 합니다.

 

대동강변 모란봉 기슭에 서 있는 을밀대. 6세기에 건설된 을밀대는 11m 높이의 돌축대 위에 합각지붕으로 맵시를 살린 아름다운 누대(樓臺)다. 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경치는 예부터 '을밀상춘'이라 해 평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혔다.

조선에 세가지 삼 (蔘) 이 있는데 산에서 나는 것은 산삼이고 물에서 나는 것은 해삼, 하늘에서 나는 것이 바로 까마귀인 비삼 (飛蔘) 이란 것입니다. " 그의 지식에 감동받는 것도 잠깐, 나는 당장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않아도 멸종 소리까지 나오는 까마귀가 이 소문이 퍼지면 정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까.

칠성문에서 조금 더 산을 오르면 을밀대가 나오고 바로 앞 봉우리에 최승대가 바라보인다. 6세기 중엽에 세워진 을밀대는 그 기능이 평양 내성의 군사 지휘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경승 (景勝) 으로 유명하다. 여기선 김일성경기장과 TV송신탑.개선문과 함께 평양 시가지가 환히 내려다 보인다. 사방 경계가 확 트여 막힌 곳이 없으니 을밀대를 일컬어 사허정 (四虛亭) 이라 한 것이 헛 말이 아님을 알겠다. 뿐인가. 을밀상춘 (乙密常春) 은 평양 팔경의 하나인데 아마도 주변 경관의 짜임새로 따지자면 그 중 으뜸일 것이다. 본래 고구려 내성의 북장대 터에 세워진 누각인데 지금도 아랫부분의 축성은 고구려 양식이 그대로 남아 웅혼한 기백을 엿볼 수 있다. 높이 솟은 돌축대 위에 2익공 바깥도리식의 합각지붕이 날아갈 듯 둥실 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 건물은 18세기 양식이라 한다. 좌향은 남서향. 역시 어떤 이론풍수적 원칙을 따르기보다 금수산의 지맥기세 (地脈氣勢) 를 자연스럽게 따른 자생 풍수의 흔적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7] 대동문과 연광정

우리가 묵던 평양 고려호텔을 나서면 바로 평양역이고 거기서 대동강변을 따라 죽 북쪽으로 올라가면 '김책공업종합대학' 을 통과해 '김일성광장' 이 나오는데 그 이웃에 대동문 (大同門) 이 있다. 대동문은 '국보유적 제4호' (북한은 최근 유적등급을 전면 개편해 과거 국보유적 1호였던 대동문을 제4호로, 평양성을 1호로 지정했다) 로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자리잡고 있다. 처음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 (東門) 으로 출발한 것이지만 지금 것은 조선시대 양식이다. 그 규모의 장대함은 서문 (西門) 격인 보통문 (普通門) 보다 윗길이다.

보통강의 보통다리와 마주한 로터리식 오거리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보통문은 아랫부분 석축에 고구려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록 대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고색창연한 맛을 풍긴다. 문루 (門樓) 는 안정되고 균형잡힌 조선시대 양식인데 다행히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중 하나가 돼 있다. 대동문에는 반원형의 무지개 문길을 낸 화강암 축대 위로 인조 13년 (1635)에 재건한 2층 문루가 있다. 일명 읍호루 (읍灝樓) 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관찰사 안윤덕 (安潤德) 이 그렇게 고쳤다고 한다.

조선초기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권근 (權近) 은 대동문의 지세를 일컬어 "아래로는 대동강의 긴 물줄기를 바라볼 수 있고 강 건너로는 멀리 광야 (曠野) 를 임하여 아침 해와 저녁 달의 온갖 경치가 모두 난간 밑에 모여 있으니 반드시 거마 (車馬) 를 수고시켜 부벽루로 돌아오르지 않고도 한쪽의 승개 (勝槪) 를 모조리 얻을 수 있다" 고 기록했다.

 

대동문은 평양 내성의 동문으로, 무지개형 성문 위에 얹혀진 2층 문루의 규모가 제법 장대하다. 대동강 흐름에 따르는 전형적인 자생풍수의 좌향을 취했다.

좌향은 동남동향 (東南東向) 으로 중국의 이론풍수가 추구하는 정방위 (正方位) 인 동향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히려 그런 이론에 치우치기보다 대동강의 흐름을 따르는 탁월한 풍토 적응성을 보임으로써 우리식 자생풍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 곁을 옹위하고 있는 성벽 또한 인공의 기하학적 균형미를 추구하기보다 역시 강물의 흐름을 따르는 유연미를 드러내 준다.

옛날에는 대동문 밖 아래쪽으로 배다리 (船橋)가 있어 관서 (關西) 의 국경지방이나 관북 (關北) 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동강에 모두 여섯개의 다리가 놓여 있으니 배다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다만 대동강 건너 평양시 선교구역 (船橋區域) 이란 지명으로 남아 옛날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우연인가, 배다리가 있던 곳에는 지금 부두가 시설돼 있고 그 옆에는 유람선과 보트를 타는 조그만 선착장도 만들어져 있다.

대동문 옆에는 아담한 종각 안에 평양종이 매달려 있다. 남쪽에서 나온 '국사대사전' 에는 '평양 동종 (銅鐘)' 이라 해 "아무런 아치 (雅致) 없고 거종 (巨鐘) 이라는 특징 뿐" 이라 돼 있지만 실제로 본 느낌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조 2년 (1726) 완성돼 평양성 북장대에 달았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무게가 13t에 육박하니 거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종 겉면에 불상.사천왕상.구름무늬.팔괘무늬.종명 등이 조각돼 있어 우아하기도 하거니와 담백한 특징을 갖고 있다. 예부터 평양성의 모든 성문은 이 종소리로 여닫겼으며 무슨 일이 있을 때도 비상경보 수단으로 울렸기 때문에 평양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는 추억어린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 옆에 있는 것이 바로 국보유적 제23호로 지정돼 있는 연광정 (練光亭) 이다.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옥류교와 강 건너로 주체탑이 빤히 보이는 위치다. 고구려 평양성 내성 동장대 터에 세워진 조선시대 누정으로 장방형 평면의 두 건물이 비껴 붙은 특이한 형태다. 높이와 크기가 서로 다른 두 '합각지붕' 의 연결부분을 직각으로 어겨 짜면서 빈틈없이 맞추어낸 솜씨가 뛰어나다. 남쪽 채는 굵은 나무기둥을, 북쪽 채는 돌기둥을 받쳐 수평을 유지했고 바닥 전면에 마루를 깔았는데 그 둘레에는 '계자각 (닭다리 모양) 난간' 을 둘렀다. '조선유적유물도감' 에는 "애국 녀성 계월향의 슬기로운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고 기록돼 있다. 계월향 (桂月香) 은 조선조 선조 때의 평양 명기 (名妓) 로 시재 (詩才)에 뛰어났던 여인이 아니던가.

 

우리가 도착하기 사흘전쯤 평양엔 눈이 내렸다. 지붕에 하얀 잔설을 이고 선 연광정 아래 대동강가에서 한 강태공이 한가롭게 물고기를 낚고 있었다.

연광정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부벽루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대동강 아래로 내려가 바라본 그 모습은 이 또한 천하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연광정의 중요성은 영명사와 함께 평양의 지세적 결점을 보완하는 비보 (裨補) 의 역할에 있는 것이지만 워낙 절경이기에 그에 대한 얘기부터 좀 더 하기로 하자. 정자는 강 아래 내려가서 보면 사면이 탁 트인 바위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이름은 덕암 (德岩) .바위가 강을 의지해 내려치는 물살을 막을 만하므로 성 안 주민들이 모두 그 덕을 입게 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강 건너 보이는 산들은 멀리 넓은 평야와 긴 숲 밖에 점점이 이어져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이루 다 형용하기 어렵다.

강계의 인풍루 (仁風樓) , 의주의 통군정 (通軍亭) , 선천의 동림폭 (東林瀑) , 안주의 백상루 (百祥樓) , 성천의 강선루 (降仙樓) , 만포의 세검정 (洗劍亭) , 영변의 약산동대 (藥山東臺) 와 함께 관서팔경 (關西八景) 을 이룬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고려 예종 때 고시 (古詩) 로 이름을 날려 해동 제일인자라 추앙받던 문간공 (文簡公) 김황원 (金黃元) 이 이곳 연광정에 올라 종일토록 생각하다가 "성벽을 끼고 흐르는 강물 넓고 질펀한데 (長城一面溶溶水) 강 건너 넓은 동쪽 들에는 점 찍은 듯한 조그만 산만 아득하네 (大野東頭點點山)" 란 일련의 글귀만 낸 채 시상이 막혀 마침내 통곡하며 내려갔다고 할 정도로 그 경치가 기막힌 곳이다.

연광정 사면에는 주련으로 된 글귀가 붙어있는데 그것은 부벽루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어떤 유적이나 유물도 현장을 떠나면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법이거늘 아무리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잘한 일 같지는 않다.

연광정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내 눈치가 썩 감탄스러워 보이지 않는지 우리를 안내한 리정남선생은 변명 비슷하게 "겨울이라 날씨가 좀 을씨년스럽습니다" 고 한다.

사실 연광정의 경치는 여름이 최고이며 수양버들의 운치는 초봄이 으뜸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겨울 운치 또한 가슴을 저미는 바가 있었다. 글쎄, 모르겠다. 리선생이 너무 내 감회에 신경을 쓰는 탓에 이런 부연을 하는 것인가.

[18] 평양의 풍수 비보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와 명나라 심유경 (沈惟敬) 이 강화를 위한 담판을 벌이기도 했던 연광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실 풍수 비보 (裨補)에 있다.

물론 현장 안내판 어디에도 풍수에 관한 얘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안내를 맡았던 리정남 선생도 그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 한다.

아마도 풍수를 '봉건도배' 들의 무덤자리 잡기 욕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들의 역사관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대동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주체탑에서 내려다 보면 평양의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동강과 보통강에 둘러싸인 평양시는 흡사 '배가 떠나가는 형국의 지모를 지녀 예부터 그 허결을 메우기 위한 갖가지 풍수비보책이 강구돼 왔다.

금수산 최고봉인 최승대나 을밀대에서 평양시내를 조감하면 대동강과 보통강에 둘러싸인 평양시의 지모 (地貌)가 마치 '배 떠나가는 형국 (行舟形)' 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미 '택리지' 에도 지적돼 있는 얘기인 만큼 꽤 오래 전부터 알려져 온 평양의 풍수 형국론일 것이다.

술법상으로 행주형에 해당하는 고을이나 마을은 그 배를 묶어놓을 닻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평양도 같은 경우로 그 닻을 연광정 밑덕바위 아래 강물 속에 넣어두었다는 것이 풍수 비보설의 골자다.

1923년 실제로 연광정 밑에서 이 닻을 건져올린 사실이 있다. 리선생은 그 일 역시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라며 흘려버린다.

당시 일본인은 풍수를 조선의 대표적인 미신으로 꼽았던 만큼 이 닻은 다시 내려지지 않고 주변에 방치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해 평양에는 대홍수가 나 평양 시가지 전체가 침수되는 천재 (天災) 를 만나게 된다.

그 이유를 닻을 올려버린 탓이라 여긴 주민들이 원래의 장소에 다시 내려놓음으로써 평양의 진호 (鎭護) 를 삼았다고 한다.

'택리지' 에는 "우물을 파면 읍내에 화재가 많이 나기 때문에 메워버렸다" 고 돼있는데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을밀대에서 내려다 보니 부벽루의 지붕이 보였다. 영명사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고 지금은 절 아래쪽에 부속건물로 지어진 부벽루만이 남아 있다. 멀리 능라도와 연결되는 청류교가 보인다.

그렇다면 평양 행주형의 풍수설화는 단순한 미신에 불과한 것일까? 일본인뿐 아니라 서구인들 역시 그런 식의 풍수를 미신으로 취급하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것같다. 우리 조상들이 모두 바보란 말인가? 뭔가 이유가 있기에 행주형이란 형국 이름을 붙이고 그에 따른 대비를 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 문제를 따져보자. 평양은 대동강이 거의 1백80도로 방향을 바꾸며 만곡하는 물길의 공격사면 쪽에서부터 도시가 시작된다.

다행히 그것을 능라도와 금수산 줄기가 가로막음으로써 완화시켜 주기는 하지만 일단 큰 물이 급격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에는 역부족이다.

뿐만이 아니다. 보통강 또한 금수산의 옆구리를 치며 만수대 쪽을 공격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홍수가 났을 때 두 물의 협공을 받으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지세가 된다.

게다가 시내 남쪽은 창광산과 해방산이 가로지르고 있어 시내로 들어온 물의 배수 (排水) 까지 막고 있는 형편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행주형 풍수설화며 사람들은 이 설화를 통해 평양의 수재 (水災) 를 항상 심리적으로 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에 유홍준 교수로부터 "평양에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령을 내린 것은 행주형 풍수설화와 관련해 지반이 침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보다 대동강과 보통강의 퇴적층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물의 장기 (장氣 : 풍토병의 원인이 되는 기운) 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 이란 식으로 답변했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하기야 프랑스 신부 달레 (Charles Dallet) 조차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 (朝鮮敎會史)' 에서 조선의 풍토를 언급하면서 "어느 곳이나 물은 맛이 없고 많은 지방에서 여러가지 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고 했을 정도니 내가 평양에 장기가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갖게 된 것도 크게 망발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직접 와서 보니 평양 중심부는 퇴적지형이 아니었다. 물에 장기의 위험성이 있는 곳은 평양시내 남부의 극히 일부, 그러니까 지금의 평양시 평천구역과 쑥섬.두루섬 일대 정도였다.

그러니 풍수의 금언대로 "보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하고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수고 (登涉之勞) 를 마다해서는 안되는 것" 이다.

반드시 현장을 본 후에야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지리학임을 이번 기회에 다시 절감한 셈이다.

어찌됐든 옛 사람들이 연광정 밑 대동강물 속에 쇳덩이를 담가둔 것은 홍수피해에 대한 상징적 대비의식에서였을 뿐 먹는 물 (食水) 과는 관계가 없었다. 홍수때 밀어닥친 공격사면에 대한 대비는 연광정의 쇠닻뿐이 아니었다.

대동강 공격사면의 핵심에 해당하는 강변에는 영명사 (永明寺) 를 세워 실질적인 홍수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평양영명사비문 (平壤永明寺碑文)' 에는 "절이 피폐해지면 중이 흩어질 것이요, 중이 흩어지면 평양의 북성 (北城) 이 허 (虛) 해질 것이다.

만약 일조위급시에 북성을 못지킨다면 평양 또한 안전치 못할 것" 이라고 기록돼 있다. 영명사가 평양 북쪽의 허결처 (虛缺處) 를 비보하기 위한 비보사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절에는 승려들이 상주한다. 평상시 그들은 대동강물의 형세를 관찰하고 위험여부를 판단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일단 유사시 홍수가 지면 그들은 급거 투입할 수 있는 현장노동력의 기능을 갖는다. 얼마나 지혜로운 홍수방어 대책인가.

무엇이 미신이란 말인가. 이건 오히려 땅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가 집적된 내세울 만한 우리식 지리학 아닌가.

평양시내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본평양(서평양)․동평양으로 나뉜다. 고층건물이 즐비한 이 사진은 대동강구역과 동대원구역이 자리잡고 있는 동평양 쪽 모습이다.

 

지금 영명사는 흔적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그리 된 것이라 하는데 그 아래쪽에 있는 부벽루만이 옛날 영명사의 위치를 짐작케 해줄 뿐이다.

부벽루의 본래 이름이 영명루였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부벽루는 모란봉 동쪽 청류벽 위에 있는데 뛰어난 경치 때문에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정의 하나로 꼽힌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3년 (393)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세웠졌다가 12세기에 부벽루로 개명된 것인데 주춧돌과 돌계단의 일부는 고구려때 것이고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 (1641)에 다시 세운 것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이런 절까지도 그 조짐을 드러내는 것일까? 고려 충선왕때 문신 이혼 (李混) 이 지은 시구는 고려가 이미 낙일 (落日)에 들어섰음을 잘 나타내 준다.

"영명사 안에 중은 안 보이고 앞에 강만 홀로 흐르누나/외로운 탑이 뜰가에 서 있고 사람 없는 나루터에 작은 배가 비끼었네/장천 (長天)에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고. 넓은 벌에 동풍은 쉴새없이 부는구나/ 아득한 지난 일을 물을 이 없으니 엷은 연기 비낀 석양에 시름겨워 지옵네. " 이 순간 나 또한 이혼의 감회를 닮아 시름겹다.

[19] 인민대학습당과 주체탑

평양은 수성 (水星) 의 땅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星湖僿說)' 천지문 '지경 (地鏡)' 조에는 고려 선종 3년 평양 남쪽 거리에 지경이 나타나 70여 보 밖에서 보면 물과 같은 그림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어둑한 빌딩숲 너머로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여명이 동트고 있었다. 멀리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지경이란 "땅에 고인물 (地鏡 地之積水)" 이라 하였으나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아지랑이와도 비슷한데 훨씬 더 신비함을 드러내는 땅의 현상이다.

성호도 지적한 것처럼 평양의 그런 변괴는 지기 (地氣)가 왕성해서 된 것일 수도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행주형 (行舟形) 의 부지 지세가 만들어낸 교묘한 수증기 현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을밀대에서 능라도쪽을 바라보니 한겨울인데도 초봄처럼 엷은 안개가 끼어 있다. 점심 먹는 자리에는 꼭 술이 따라 나온다.

그래서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하고 대화내용에도 농담이 곁들게 마련이다.

'안내원선생' 중 나이 지긋한 한 분이 내게 "최선생, 좋은 산소자리 하나 잡아 주시기요" 하며 농담을 건넨다.

물론 웃자고 한 얘기인데 워낙 성품이 곧고 학자풍인 리선생이 정색을 하며 그 말을 무지른다.

"최선생은 그따위 '가짜풍수' 를 하는 분이 아니고 '민족지형학자' 란 말입니다. "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풍수를 전공하면서 지금까지 온갖 수모를 다 겪어 왔는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그것을 '민족지형학' 이란 단적인 표현으로 지적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 평양의 명당 (明堂) 혈처 (穴處) 는 어디쯤 될까? 지리학전공자인 내게는 당연한 관심사가 될 터인데 점심 식사 중에 마침 그 얘기가 나왔다.

그들 말로는 "평양의 명당 핵심 자리는 바로 '인민 대학습당' 터" 라는 김일성 (金日成) 주석의 얘기가 있었다고 했다.

 

인민대학습당을 방문했을 때 복도에서는 김정일비서의 생모인?김정숙탄생 80돌기념일?행사에 대비해 10여명의 여직원들이?고구려 춤사위?연습을 하고 있었다. 24×44cm.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는 곧장 인민대학습당으로 향했다.

실제로도 인민대학습당은 평양 중구역의 가장 중심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건물 바로 밑에 인민군의 열병.분열을 사열하는 주석단이 자리잡고 있고, 또 그 밑에는 우리의 '도로기준원표' 에 해당하는 '평양 나라길 시작점' 이란 돌비석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사실상 북한의 중심 축선에 해당하는 선이다.

그 좌우로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섰고 앞으로는 약간 비껴서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이 양쪽을 받쳐주며 대동강 건너로는 역시 일직선상에 '주체 사상탑' 이 우뚝하다.

그 사이 공간에 김일성광장이 마련돼 있어 권위주의적 공간 배치로는 나무랄 데가 없어보인다.

인민대학습당에 들어가면 1층 중앙홀에 북한의 중요 건물 어디서나 그런 것처럼 김일성주석의 좌상이 거대한 백두산 벽화를 배경으로 배치돼 출입자를 압도한다.

연건평이 10만㎡에 이른다는 인민대학습당에는 6백여개의 방에 10여개의 열람실, 17개의 '록음강의실' 이 있으며 5천여석의 좌석과 3천만권의 장서능력 (현재는 2천7백만권을 소장) 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한 열람실에 들어갔을 때 동행한 통일문화연구소 권영빈소장이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여학생에게 "대학생인가요?" 라고 물으니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예, 평양기계대학 금속기계공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열람실 옆에는 방마다 문답실이 있어 2백50여명의 연구원이나 교수들이 열람자들의 질문에 즉석에서 답을 해준다고 한다.

도서관 기능을 하면서 교육도 병행하는 일종의 사회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도서 대출대에서 책 대출 업무를 하고 있는 여직원의 얼굴은 마치 어릴 적 담임선생님을 연상케하는 고전형이다.

우연히 책 한권을 집어보니 영문으로 된 '기업의 정신 (Spirit of Enterprise)' 이라는 책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런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의외였다.

복도에서는 직원 10여명이 '김정숙탄생 80돌기념일' 을 준비하는 율동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역동적인 율동인데 고구려식 춤사위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듣고 본 평양 사람들의 노래와 춤은 마치 어릴 적 동네극장에서 본 '쇼' 를 연상케 할 만큼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사실이 그렇다는 뜻이다.

여하튼 사소한 일 하나 하나가 신기하기만 한데 그런 걸 신기해 하는 것 자체가 또한 신기한 일이다.

같은 민족이고 행동도 다를 바 거의 없지만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게다.

인민대학습당에서 주체사상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능라도를 가로지르는 능라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동평양지역으로 지금은 대동강구역.동대원구역 등으로 이뤄져 있다.

오른쪽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동평양대극장.평양볼링관.김일성고급당학교 등이 줄을 이어 나타난다.

 

평양 중구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풍수적으로 보아도 명당혈처라고 할 만하다. 인민대학습당 바로 아래에는?평양 나라길 시작점?이란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앞에 그 높다란 주체사상탑이 자리하고 있다.

강 건너 평양 명당의 핵심이라는 인민대학습당.김일성광장과는 일직선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위치다. 주체사상탑은 1982년 완공되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높이 1백70m 꼭대기에 있는 붉은 봉화탑만도 20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이다.

김일성주석의 70회 생일을 맞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70년을 날짜로 헤아린 숫자인 2만5천5백50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축조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북녘 사람들의 숫자에 대한 관념은 강박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고하고 정확하다.

좌향은 서남서향으로 이들이 풍수 이론적 상징성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체탑의 꼭대기에 올라 평양을 조망한다.

한눈에 평양뿐 아니라 그 일대가 다 바라보인다.

북쪽으로 능라도 맞은편은 문수거리라 부르는데 옛날 문수리 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강변으로 대동문.연광정.부벽루.을밀대가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그 끝이 아스라하여 어지러울 지경인 낙랑준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마치 베이징 (北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륙을 연상케 하는 풍광이다.

동쪽 들판 가운데쯤 문수봉 (紋繡峰) 이 보이는데 그 아름다운 이름 때문일까, 일대에 평양음악무용대학.평양연극영화대학.평양미술대학이 거의 붙어있다시피 모여 있다.

문수가 끌어들인 예술의 장, 풍수는 여기서도 그 인연을 찾고자 한다.

[20] 단군릉

12월 19일 오전 9시 '단군릉' 을 향해 출발한다. 차는 곧 평양의 실질적 진산 (鎭山) 인 대성산 자락을 지난다. 대성산은 구룡산 (九龍山) 혹은 노양산 (魯陽山) 이라고도 하는데 산마루에 아흔아홉개의 못이 있어 날이 오래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길가에서 보이는 대성산쪽을 바라보면 소문봉이 제일 높다랗게 솟아있다.

 

94년 10월 준공된 단군릉은 퉁구의 장군총을 3배 크기로 본떠 9층의 계단식 돌각담 무덤 형식으로 축조됐다고 한다. 한변의 길이가 50m, 높이 22m,의 엄청난 규모를 가진 단군릉은 5천년 전의 유적이라기보다 북한이 마음먹고 지어낸 20세기의 인공 모뉴멘트라고 해야 적절할 것 같았다. 58X24cm, 모눈종이 위에 채색.

그러나 실제 최고봉은 장수봉으로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연개소문을 기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소문봉 꼭대기로는 '소문봉정각' 이란 정자가 아련히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밋밋한 토성 (土星) 의 산체지만 나중에 자세히 관찰하니 물뱀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형국의 수성 (水星) 임이 분명하다.

주변은 역시 질펀한 '벌방 (평야)' 이다. 길가에는 회색의 2, 3층짜리 연립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조금 안쪽으로는 단층집들도 여럿 보인다. 대성산을 제외하면 일대에 산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낮은 둔덕에 잔솔밭이 덮여 있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농촌의 그것 그대로다.

간혹 눈에 띄는 '다락밭 (계단식 경지)' 의 흙색깔은 진적색으로 꽤 걸어 보인다. 밭은 과수원으로 많이 이용되는 듯했다. 둔덕 여기저기 나지막한 재래식 무덤들도 눈에 띄고 길은 조그만 야산인데도 터널을 뚫은 곳이 몇군데 있다. 대동강에는 모두 여섯 곳의 갑문이 건설돼 있는데 차는 그중 중류인 평양시 삼석구역과 강동군을 연결하는 봉화갑문을 지난다. 현재 북한에는 면 (面) 제도가 없는 탓에 강을 건너면 바로 강동군 봉화리가 된다.

그 부근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전쟁 후 농촌 현대화를 위해 벌방 가운데 3층짜리 집체식 주택 (집단주택) 을 지어 주었는데 주민들이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를 대지도 못하며 무작정 싫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는데 나중에야 그들이 산자락에 의지해 살던 버릇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 산자락으로 집을 옮겨주니 정을 붙이고 살더라는 얘기다.

강동군 문흥리에 서면 사방 어디에서나 대박산 기슭의 단군릉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단군릉은 본래 위치에서 5km쯤 옮겨와 복원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남한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화도 간척지의 경우다. 지금도 그곳 주민들은 생산성을 생각해 들판 가운데, 그러니까 농경지 가까이 마을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본래 육지였던, 둔덕이나마 명색이 산이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봉화리에서 조금 더 가자 단군릉이 있는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닿는다.

현재의 단군릉은 본래의 능묘 위치에서 5㎞쯤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단군릉을 풍수적으로 평가한다는 게 조금은 우습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터를 선호했는지가 관심사였는데 최근 옮겨온 것이라니 실망감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1993년 9월 친히 현지를 찾으시어 능터를 잡아주시고 시조릉 개건의 웅대한 설계도를 펼쳐 주시었다" 니 거기 내가 헤아리지 못할 깊은 뜻이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金주석의 풍수적 안목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군릉은 대박산에 병풍처럼 감싸여 있고 대박산 동남쪽의 절맥처 (節脈處) 를 그 혈장 (穴場) 으로 삼은 듯하다. 대박이란 박달나라의 큰 임금이란 뜻이니 즉 단군이다. 산의 북동쪽은 연맥 (連脈) 인데 아달산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에서 단군의 도읍이 아사달이라 한 것을 보면 그것과 관련된 지명이 아닌가 짐작된다.

강동군내 고분위치도

 

서쪽도 낮은 구릉이고 상당히 넓은 들판을 건너 남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산들이 수성의 형자 (形姿) 를 취하고 있으니 현무 (玄武). 주작 (朱雀). 청룡 (靑龍). 백호 (白虎) 의 사신사 (四神砂) 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 형세다. 대박산은 크게 보아 금성 (金星) 이고 조안 (朝案.명당의 앞쪽을 말한다) 방향이 수성이니 금생수 (金生水) 의 상생관계요, 좌향 또한 자좌오향 (子座午向) 의 정남향이라 중국식 이론풍수가들이 보자면 대단한 길지 (吉地) 라는 얘기도 나올 법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벌판 남쪽 귀퉁이를 흐르는 수정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당수 (明堂水)가 서출동류 (西出東流) 하기를 바라는 지관들의 관점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관계가 없다. 우리식 자생풍수는 오직 풍토 적응성에 관심을 가질 뿐 고사성어 (故事成語) 식으로 된 풍수원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공연대가 1994년이므로 1천9백94개의 화강암으로 쌓았다는 봉분의 거대함은 한마디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일제의 도굴로 유물은 별로 출토되지 않았다는데 역시 중요한 것은 남녀 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일 것이다. 나중에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단군과 그 '안해' 의 진품 유골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의 설명으로는 '단군' 뼈는 1백70㎝ 정도 되는 기골이 장대한 70세 노인의 것이고 그 왼쪽에 있던 '안해' 의 유골은 노동을 모르고 자란 귀족 출신으로 30세쯤 돼 보이는 젊은 여성의 것이라 한다. 이처럼 유골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능이 석회암 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스며든 광물질이 작용해 유골을 화석화했기 때문이며 또 유골을 부식시키지 않는 전형적인 중성 토양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앙력사박물관은 단군릉에서 출토된 유골의 모형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단군릉에서는 남녀 한쌍의 것으로 보이는 86개의 뼈와 금동와관 조각이 발굴됐는데 북한은 이것이 단군과 그의?안해?유골로 확인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단군에 얽힌 설화 한가지를 소개한다. 우리나라 명산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마고할미설화란 게 있다. 마고할미는 일종의 여성 산신으로 보면 될 텐데 그 마고할미가 단군과 화해한 전설이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으로 있는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전투에 진 마고할미는 달아나서 박달족과 단군족장의 동태를 살피는데 알고 보니 자기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고할미는 단군에게 심복하게 됐고 단군은 마고할미의 신하인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해 극진히 대접했다.

그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을 구빈 (九賓) 마을이라 하고 마고할미가 단군에 복속하기 위해 고성으로 되돌아오며 넘은 고개를 왕림 (枉臨) 고개라 한다는 것이다.

단군과 마고는 둘 다 자생적인 우리 민족 고유의 신이다. 하나는 남성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런 두 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화해하고 하나가 됐는가.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그걸 말해주는 설화를 남녘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녘에 와서 그 설화를 접하니 결국 우리 고유의 신은 어디선가는 합치는구나하는 묘한 감회에 젖어들게 된다.

[21] 대성산성과 안학궁터

단군릉 답사 후 오후에는 대동강 지류인 합장강을 건너 대성산으로 향한다. 대성산에는 가장 북쪽에 국사봉이 있고 동쪽에는 최고봉인 장수봉과 을지봉, 남쪽에는 소문봉, 서쪽에는 주작봉이 있는데 그 봉우리들을 대성산성 (국보유적 제8호) 이 빙 둘러싸고 있다.

주작봉 줄기가 내려오다가 매듭을 맺는 곳 (節脈處)에 혁명렬사릉이 조성돼 있고 그 아래로는 대성산류희장과 중앙동물원이 있어 평양시민들의 휴식공간 노릇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 (427)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 당시 천도하면서 처음 정한 자리가 대성산 일대다. 왕궁은 안학궁이었고 수도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이 대성산성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도성인 평양성 - 장안성을 쌓고 수도를 옮긴 것이 평원왕 28년 (586) 이니 대성산일대는 1백60년 동안이나 고구려 수도가 됐던 셈이다.

평양의 주산 대성산은 풍부한 물을 품고 있어 평양시민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대성산은 성격상 수성(水聖)에 해당하는데 대성산성 내에서만 1백70여 개의 우물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북한은 이중 80여개의 우물을 복원해 놓았다. 35X50cm

대성산은 그 성격으로는 수성 (水星) 이지만 형태로는 일별하여 토성 (土星) 을 취하고 있다. 토성은 풍수에서 산 정상부가 밋밋한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 (天祭壇) 을 닮았다 하여 도읍의 주산으로서는 무척 높이 보는 산형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성산성의 특징을 꼽자면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는 점일 것이다. 기록에는 성내에 99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돼 있지만 실제 지표조사를 해보니 무려 1백70여 군데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고 그중 80여 곳은 복원까지 마친 상태라고 했다.

별로 우람한 산세도 아닌데 그렇듯 많은 우물을 팔 수 있는 곳을 수도의 주산으로 잡을 수 있었다면 당시 사람들이 '땅의 이치 (地理)' 를 보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왔다고 할 만하다. 고구려가 이곳에 터를 잡은 5세기 경은 아직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설이 도입되기 전이다.

따라서 우리식 지리학 즉 자생풍수의 실력과 위력이 대단했다는 뜻이 되므로 나로서는 반가운 예가 아닐 수 없다. '여지승람' 이 기록하고 있는 대성산성의 둘레는 2만4천3백척, 약 7㎞에 달한다. 그중 2백m 정도는 복원됐고 나머지도 군데군데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63년 복원했다는 소문봉 정각에서 바로 아래 있는 안학궁지 (安鶴宮址) 를 바라본다. 고구려는 왕궁 거점으로서의 평산성 (平山城) 인 안학궁과 비상시 방어 겸 대피처인 대성산성을 같이 축조했다. 안학궁이라는 궁이름은 학이 편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문봉의 생김새에서 유래됐다는데 그건 아무래도 훗날 지어낸 말 같다. 실제로는 산에 감싸안긴 곳, 즉 안쪽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동행한 중앙력사박물관의 리정남선생도 내궁 (內宮) 의 뜻으로 쓰인 말일 것이라며 내 생각에 동의해주었다.

안학궁은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건설한 왕궁인데 지금은 황량한 들판에 터만 남아 옛날의 위세(威勢)를 짐작케 할 뿐이다. 북한은 이 궁터를 67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해 동서길이 6백22m, 남북길이 6백20m에 걸쳐 52개소 건물지를 확인했다.

안학궁터 (국보유적 제2호) 주변은 상당히 넓은 들판이다.

궁터를 잡으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른 네모꼴 (正四角形) 을 취할 수 있는 조건의 땅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안학궁터를 보면 뒤쪽, 즉 북쪽으로는 대성산에 기대 그 지세를 이용했고 벌판쪽으로 난 나머지 삼면은 이상하게 찌그러진 형태다. 북동쪽으로 6도 정도 기울었고 서쪽으로 10도쯤 기울어진, 그러니까 눌러놓은 정사각형이나 불규칙한 마름모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기하학적인 균형이나 조형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형태다.

그런데 묘하게도 주변의 자연지세와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어떤 인위적 이론에 의한 축성이 아니라 풍토에 적응시켰기 때문일텐데, 역시 자생풍수의 영향을 여기서도 볼 수가 있다. 소문봉 품안에 안학궁을 들어 앉히는데 그 품을 인위적으로 재단하여 균형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조화를 추구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중국풍수가 균형을 강조한다면 우리 풍수는 조화를 중시한다. 이것은 중국 역대 수도의 궁궐 배치와 고구려.백제.고려의 수도 궁궐 배치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후대에 이르러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뒤에 건설된 서울의 궁궐, 특히 정궁인 경복궁의 경우는 조화보다는 기하학적 균형 감각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문봉 앞쪽 (풍수적으로는 案山에 해당한다) 으로는 길게 낮으막한 둔덕이 동북동 - 서남서 방향으로 지나가는데 이 또한 안학궁의 남쪽 성벽과 흐름을 같이 한다. 자연에 조화로운 것이다. 굳이 안산이라고 칭할 만한 산은 그 중 가장 높은 해발 30m정도의 산이고 나머지는 그에 잇대어 줄을 지어 쳐놓은 병풍처럼 보인다.

안학궁성은 토석혼축성 (土石混築城) 으로 도로에서 소문봉을 향하여 들어가다 보면 그 흔적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이곳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리선생의 안내로 남문터를 찾았다. 그 터에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주춧돌이 서있던 자리가 우묵하게 여러 곳 보인다.

고려 정궁인 만월대가 39만㎡인데 안학궁이 38만㎡이니 5세기의 축성으로는 실로 거대한 규모라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완전한 평면처럼 보이지만 실제 가서 보니 소문봉을 향해 계단식으로 점차 올라가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자연 지세를 흐트리지 않고 풍토에 적응시키려는 자생풍수적 축성이라 생각된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남벽은 높이가 2.3m, 남벽에만 성문이 3개 있었고 나머지는 각 방위별로 1개씩 있었다고 한다.

대성산은 길이 잘 닦여 있다. 소로의 시멘트 포장길인데 산책이나 간단한 등산로 혹은 조깅코스로 이용하면 알맞을 듯하다. 주변에는 곳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우물도 곁에 있다. 물 하나는 정말 풍부한 산이다.

새소리가 시끄러워 물어보니 '박새' 라 한다. 꼭 참새만한 놈들인데 색깔은 더 곱다. 새소리에 숲을 헤지며 지나가는 겨울 바람소리가 스산하기보다 정취를 더 한다.

한가지 큰 아쉬움이 있다. 대성산성으로 오다가 건넌 합장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면 평양시 룡성구역에 대화궁 (大花宮) 터가 있는데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대화궁은 고려 인종 때의 신궁으로 묘청 (妙淸) 의 풍수지리설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묘청은 스스로 자생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 (道詵國師) 의 맥을 이었다고 자부한 인물인 만큼 그의 터잡기가 지니는 의미는 실로 크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이 자생풍수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는 묘청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기로 한다.

"이것 (대화궁 터잡기 방법) 은 태일옥장보법 (太一玉帳步法) 인데 도선선사께서 강정화 (康靖和)에게 전하였고 그가 다시 내게 전하였으며 나는 늙으막에 백수한 (白壽翰) 을 얻어 전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대화궁이 자생풍수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 알 수 있다. 자생풍수를 찾는 나로서는 이번에 직접 답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22. 끝] 동명왕릉

평양 중심에서 원산가는 길을 따라 버스로 30분쯤 달리면 광활한 락랑준평원이 끝나면서 처음으로 산같은 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마지막 답사지인 동명왕릉이 있다.

동명왕은 스물두살 때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세운 왕으로 본래 산소는 졸본성 부근에 있었으나 장수왕 15년 (427)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올 때 함께 이장하여 오늘의 자리에 묻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느낄 수 있는 풍수는 기원 전의 그것이 아니라 5세기 고구려의 것이 되는 셈이다.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약 20km쯤 내려오면 나지막한 구릉 한가운데 동명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93년 5월 복원․완공된 동명왕릉은 전형적인 중국식 풍수 터잡기 방법에 따라 조성돼 있어 마치 서울 근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임금들의 능을 보는 느낌이었다.

장수왕이 천도때 移葬

이곳을 보며 처음 느낀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자생풍수와는 별 상관없이 전형적인 중국식 풍수 터잡기 방법으로 쓰여진 곳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 근교에서 흔히 보아오던 조선조 임금들의 능을 보는 느낌 그대로였다.

좌향 (坐向) 은 정남 (正南) .자연스런 산의 흐름을 약간 비켜난 듯한 자리잡음이다. 뒤쪽 주산 (북쪽은 玄武에 해당됨) 인 룡산 (龍山) 은 봉긋봉긋한 모양의 금성 (金星) 이 이어진 가운데 우뚝한 형태 (直聳, 따라서 木星) 의 봉우리 하나가 정점을 이루며 능을 향해 맥을 뻗고 있다. 이론대로 꼿꼿이 자란 나무를 닮은 봉우리 (玄武垂頭) 였다.

주산에서 혈장 (穴場.이 경우는 동명왕릉) 으로 맥을 주고 있는 입수맥 (入首脈) 의 전형과도 같다. 조산 (朝山.무덤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朱雀에 해당된다) 인 마장산은 풍수이론상 춤추는 듯한 형세 (朱雀翔舞)가 무리를 지은 모습으로 마치 물결처럼 펼쳐져 있다. 백호 (白虎) 는 룡산의 맥이 이어진 본신백호 (本身白虎) 인데 이 또한 이론대로 웅크리고 앉은 호랑이의 모습 (白虎준踞) 이요, 청룡 (靑龍) 은 설매등 넘어 재령산이 길게 펼쳐졌는데 마찬가지로 이론에서 주장하는 용이 꿈틀대는 모습 (靑龍원) 그대로다.

이곳을 보고 김일성주석이 풍수설에도 잘 맞는다고 했다는데 정확한 지적 같다. 요즘 지관들이 보면 무척이나 탐을 냈을 만한 땅이다. 문제는 그것이 자생풍수가 아니라 중국 풍수이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데 있다.

74년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리정남선생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중국과 가까웠고, 장수왕이나 그 막료들 중에 중국풍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가설을 제시한다. 동감이다. 게다가 장수왕은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백제와 신라 경략에 힘썼던 왕이니만큼 그 개연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왕릉 주위에 있 소나무들은 조선시대 해송을 이식한 것이다. 도합 1천6백여 그루, 그 소나무들이 봉분을 향해 절을 올리듯 몸을 숙이고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잘 보면 몸을 숙인 방향이 꼭 능쪽만은 아니다. 일정한 방향성을 말할 수 없이 제멋대로 뒤틀려 있다는 것이 정확한 현장 설명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능과 그 주변 땅 기운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소위 지기가 소용돌이 치는 장소 (地氣渦流之處)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 속의 시신이 없어지는 소위 도시혈 (逃尸穴) 자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逃尸穴자리 가능성도

 

열흘동안 부간땅을 답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공원에서 데이트 하는 남녀, 썰매 타는 시공 아이들, 관광지로 여행온 젊은이들, 유적 해설원 등 세월을 뒤로 건너뛰어 한때 우리의 모습이 꼭 그랬으리라 싶은 북쪽 사람들의 갖가지 삶의편린에서 정겨움과 함께 짜릿한 향수를 느꼈다.

도시혈이란 토양포행 (soil creep) 의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지표면과 기반암 사이의 토양층이 기온의 계절적 차이에 의해 움직이거나 사면을 따라 이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땅에서는 시체가 없어지는 일도 생기고 엎어지거나 돌아눕는 일도 벌어진다.

단순한 자연현상일 뿐 조금도 괴이하거나 신이 (神異) 한 일이 아닌데도 종종 지관들이 이걸 가지고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일이 있다. 이곳에는 본래 개미가 없었다고 하는데 도시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74년 발굴 이후에는 개미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도 없는 것이, 만약 도시혈 자리라면 무덤 내부 석실에 틈이 생기거나 벽면에 금이 갔어야 하는데 전연 그런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동명왕릉 주위에 신하들의 무덤을 썼는데 그 무덤들이 왕릉보다 위쪽으로 가 있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에만 있던 독특한 풍습으로 배총 (培塚) 이라 하는 것인데, 사실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왕의 뒤에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곳 여성안내원 리선생은 명랑하고 아리따운 처녀인데 늘 밝게 미소 띤 얼굴로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한다. 숲속에서 딱따구리가 우니까 혼자서 '딱 따르락, 똑 또르락' 하며 흉내를 내기도 하고 자신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눈치가 보이면 싫은 기색도 한다. 그녀가 제일 소개하고 싶어하는 곳은 역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다. 6세기에 활동한 온달장군과 그의 아내인 평강공주의 무덤은 진파리 4호분으로 동명왕릉 구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평강공주가 남편을 위해 자신도 함께 묻힐 이곳을 직접 고르고 조성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가 벽화는 사신도와 장식 무늬가 화려하고 특히 소나무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 풍경화를 대표하는 것이다.

평강공주 자신을 위해서는 머리를 틀어올린 여인들이 용이나 봉황을 타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을 제작해 두고 있었다. 동명왕릉을 보고 평양시내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다. 평양체육관 1층에 있는 진달래식당에서 냉면정식을 먹어본다. 냉면과 볶음밥이 같이 나오는데 맛이 있다. 국과 깍두기도 서울맛에 가깝다. 12월 26일. 내일 중국 베이징 (北京) 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별다른 일정 없이 정리시간을 갖기로 한다.

짐을 싸기 시작하니 비로소 평양에 있다는 깊은 감회가 밀려든다.

빗속 "평양이여 안녕"

사실 처음에는 흥분과 걱정, 기대와 불안감이 교차해 제대로 된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평양이란 지명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누구나 그런 나의 감상을 눈감아 줄 수 있으리라. 다시 진달래식당에서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식사도중 한 안내원선생이 "풍수는 매우 특이한 시각이며 이번에 긍정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도 이곳에 와서 좋은 쪽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적지 않은 것 같다.

12월 27일 토요일. 7시 15분 보름 동안 머물던 평양 고려호텔을 출발한다. 어젯밤에는 비가 조금 내렸고 공항에는 옅은 안개가 끼어 있다. 이별하기에 알맞은 날씨를 만들어 주는 하늘의 배려라 생각한다. 9시 10분 이륙. 청천강과 안주.박천평야를 지나 비행기는 광막한 만주 벌판을 날고 있다. 너무나 감격적인 답사였지만 때로 가슴이 터지는 듯한 답답함도 느꼈던 여행이었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