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서 비롯된 인간의 역사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인류의 문명은 발생하여 꽃을 피웠다. 이 4대강 유역은 땅이 비옥하여 농경생활을 중심으로 한무역과 민족의 이동 그리고 민족간의 전쟁을 통해 고대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큰 강의 유역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생활과 하천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큰 강의 유역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한강이나 낙동강, 영산강 등 강에서 고대 문명이 발생되었으며 사람들의 삶터 역시 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 중 가장 좋은 곳을 계거溪居 즉 시냇가 근처라 하였다. 산을 등지고 앞에 내가 흐르면 농사를 짓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좋은 곳을 강거江居 즉 강가 근처로 보았으며, 해거海居 즉 바닷가 근처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 강가에서 가장 살만한 곳으로‘예안의 도산’과‘안동의 하회’를 들었다.
“도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된 낙동강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 이중환의 글이다.
낙동강의 역사와 문화
그런 연유로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서원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다. 네 곳 모두가 ‘사람이 대대로 모여 살만한 곳’으로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한 곳이다.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다.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한 땅인 영남지방은 영남 유학의 산실이자 인재의 보고였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라는 말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강변이었다. 안동의 이황, 선산의 길재, 산청의 남명, 형산강변인 경주의 이언적 등이 모두 강변에서 그들의 학문을 완성시켰다. 낙동강 천삼백 리 물길이 흐르는 곳곳에 고분군들이 산재해 있는 것도 강에 기대 살아온 사람들의 삶터였기 때문이다.
구미시 낙산동에는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어있는 낙산동 고분군이 있다. 6만 7천여 평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낙산동 고분에는 2~6세기에 만들어진 가야·신라시대의 고분인 205기의 무덤이 있다.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불리고 있는 가야의 땅은 또 어떤가?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 등 6가야의 동맹체들이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도 고령과 창녕을 비롯한 낙동강 일대에는 속이 텅 빈 고분들만 남아 있고, 일본에 가면 그 속에 있던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양산시 원동면에 있는 가야진에 공주 웅진과 함께 신라 사독 중의 하나인 남독이 있었다. 해마다 조정에서 향촉과 사자를 보내서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제사를 지냈으며, 한발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근처 낙동강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진 곳이다. 미국의 워커장군이 왜관에 있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26분 동안에 퍼부은 폭탄이 무려 960톤에 이르렀다. 이 폭격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 모여 있던 북한군 사만 명 중에 적어도 삼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낙동강은 붉은 핏빛으로 물든 채 흘러갔다.
우리민족의 젖줄인 한강의 문화
우리민족의 젖줄 또는 대동맥이라고 불리고 있는 한강은 강원도 태백의 검용소에서 부터 비롯되어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의 유도를 지나 서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한강 유역은 삼국시대의 각축장으로 삼국의 흥망성쇠가 여기에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사람과 물자를 대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강을 맨 처음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고 한강 유역을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기며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것은 475년이었다. 한강을 두고 백제와 고구려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551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 10여 개 군을 차지하였고 백제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다. 2년 뒤 백제와의 동맹을 깬 진흥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까지 독차지하였고 영토회복에 나섰던 고구려의 온달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강을 건너는 도중에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죽었다.
결국 한강 유역은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 그 고구려와 신라가 투쟁했던 흔적이 충주시 가금면의 중원 고구려비와 구리의 아차산성, 영춘의 온달산성으로 남아있다. 예성강 근처에 도읍을 정했던 고려를 멸망시킨 태조 이성계는 한강변 서울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고서 오백 년 사직을 일구었다. 그 뒤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는데, 그런 연유로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낳기도 했다.
이 한강변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아차산성과 마주보는 형세인 이 풍납토성은 한강 남북교통의 요충지로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송파구의 삼전도비와 임진왜란의 승전지인 행주산성을 지나면 한강의 마지막 지류인 임진강을 만난 강은 애기봉 자락을 지나 유도에서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금강
이름조차 비단강인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영동과 옥천을 거쳐 군산 하구둑을 지나 서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475년 도읍을 금강변의 공주로 옮겼다. 다시 도읍을 부여의 사비성으로 옮긴 백제는 사비성에서 123년간 찬란한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나당 연합군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제의 뒤를 이어 후백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뒤로도 이 지역은 여러 형태의 민중혁명이 일어났는데, 요원의 불꽃같이 일어나 스러져간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린 곳도 바로 금강변의 곰나루였다.
남도를 질펀하게 흐르는 영산강과 섬진강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은 담양에서부터 비롯되어 질펀하게 흘러 목포에서 강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는 강이다. 광주와 나주 등 크고 작은 도시 사람들의 생명줄인 영산강은 “광산 큰 애기 오줌만 싸도 넘친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홍수가 잦았었다. 목포와 영암을 잇는 영산강 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 홍수 때문에 입는 피해는 줄어들었지만 하구둑 때문에 입은 피해 또한 만만치 않다.
영산강의 지류인 영암천 끄트머리에 있는 덕진포는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싸움터였고 삼포천을 따라 올라간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성 주변에 나주대안리 고분군(사적 제76호)와 나주신촌리고분군(사적 제77호), 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제78호)의 삼국시대 고분군들이 밀집되어 있다. 영산강 일대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이 일대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살았음을 추측하게 한다.
영산강보다 길이가 더 넓으면서도 4대강에 들지 못하는 섬진강을 두고 ‘어머니 같은 강’ 또는 ‘누이와 같은 강’이라고 평하는 것은 그만큼 섬진강이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운 마치 고향의 품 같기 때문이다. 섬진강은 진안에서 발원하여 광양 앞바다로 들어가는 강인데, 섬진강의 하류에 있는 하동의 화개골은 우리나라 차 문화의 발상지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때에 당나라에서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기슭에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강이 온전해야 사람이 살 수 있다.
강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 민족의 저력이 모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흐르면서 깊어지는 강, 강이 온전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도 이어갈 수 없고, 강을 제대로 보존해야 인간의 미래가 있다. “강물은 감자를 심지 않네, 목화도 심지 않네. 심는 사람은 잊혀지지만 유장한 강물은 흘러서 갈뿐”이라는 강물노래처럼 강은 세상사와는 무관하게 유유히 흐른다.
01 섬진강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하동은 우리 땅의 새봄이 열리는 곳이다. 활짝 펼쳐놓은 푸른 비단 위에 먹으로 점을 찍은 듯 섬들이 흩어져 있다.
02 길이 525㎞의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동국여지승람》,《척주지》,《대동지지》등에서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밝혀 놓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지·중지·하지로 이루어진 둘레 100m의 소(沼)에서 하루 5,000t의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글·신정일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사진·문화재청,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