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과 함께
하늘이 맑은 바다색을 만들어 내는 가을 오후, 그는 옛 추억을 더듬으며 ‘길’ 여행을 시작했다. 추억 속에 잠겨 흐릿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라 눈과 발이 이끄는 대로 그는 몸을 맡기며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곳은 가회동 31번가 ‘북촌길’. 어쩌면 그에게 ‘북촌’은 생소한 단어였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이 세상 속에서 그의 추억의 장소들은 언젠가부터 ‘북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북촌’을 걸으며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한 켠으로 비켜있던 추억들과 재회를 기다렸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곳은 부촌이었어요. 궁궐과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곳 한옥들은 이제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건축물이지만 그만큼 그 수가 적기에 큰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집들이에요.”
북촌은 경복궁,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위치한 전통한옥이 밀집된 전통 주거지역이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고 해서 붙여진 ‘북촌’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가회동, 송현동, 안국동, 삼청동 등이 있다. 원래 조선시대 권문세족들의 가옥들이 밀집해 있었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 토지가 소규모 택지로 분할되기 시작했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집들이 밀집되어 있고,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 올 때에 유행에 따라 새로운 건축양식을 섞어온 한옥들도 꽤나 많이 있다. 북촌에 뻗어있는 수많은 길들은 북촌의 신비로움과 함께 곳곳에 숨겨진 재미를 찾아 주는 통로가 되고 있다.
추억과 함께
“중학교 시절 화판을 들고 골목길 적당한 곳에 앉아 그 풍경을 그리곤 했지요. 그 때 미술반이었거든요.”
양쪽에 빽빽이 들어선 한옥들 사이에 난 자그마한 길은 애틋한 옛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북쪽으로 높은 지형의 특성에 따라 높은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한옥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고, 한옥과 가을 하늘과의 조화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그 길을 따라 골목길 끝에 다다라 뒤를 돌아보면 서울 시내를 마주하게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전경은 왜 이곳이 보존될 수밖에 없는지 알것 같다.
“우리 한옥구조는 대개 ㅁ자 모양을 띠고 있어요. 어쩌면 폐쇄적으로 보이는 이 구조는 가족 중심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반영하죠. 그리고 집 가운데에는 언제나 중정원이 있어요. 이것은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는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스페인에 가면 ‘patao’라는 가옥 구조가 있어요. 가족 중심적인 우리와 비슷한 성향을 보여주고 있지요. 스페인과 우리나라 가옥의 특별한 교류가 없었지만, 세계를 뛰어넘는 생각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지요.”
가회동 길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들이 여럿 있다. 김형태가옥(서울시민속자료 제30호), 이준구가옥(서울시문화재자료 제2호) 등이 있지만 모든 가옥들이 문화재로 지정 되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로처럼 펼쳐져 있는 북촌의 골목골목들을 걸으며 가옥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며, 사람 소리들을 들으며 생생히 숨 쉬고 있는 한옥들의 정취를 느끼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가회동 31번가 여행의 끝을 장식하는 ‘정독도서관’은 그가 가장 기대하고 설레 했던 곳이었다.
“44년 만에 찾아온 것 같아요. 이곳은 전에 내가 중·고교 시절을 보냈던 ‘경기고’ 가 있던 자리예요. 저 등나무는 제가 학창시절에 앉기 좋아했던 곳이죠.”
모든 것이 강북에 밀집되어 있었던 1970년대에 ‘경기고’ 는 강남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 자리는 오늘 ‘정독도서관’ 으로 활용되고 있고, ‘경기고’ 당시 도서관이었던 곳은 교육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변해 있었다.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무척 많이 보았어요. 그 당시는 책이 귀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 있는 것이 행복했죠. ”
그는 오늘의 그를 만든 무수한 경험들 중 하나가 형성되었던 그 곳을 지금도 만나볼 수 있음에 행복해 했다. 우리의 한옥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생존해 있다는 것은 지난 추억을 풍성하게 하고, 새로운 추억들을 또 만들어 준다.
젊음과 함께
조선시대 권문세족들이 살고 있던 이 곳 한옥들은 개화기에 개화파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또 시대가 변하면서 대규모 시설들이 들어와 경관을 크게 바뀌게도 하였지만 이제는 북촌을 소중히 가꾸고자 하는 시도로 한옥들이 보존되고 있다. 한옥 속에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살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곳을 찾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문화욕구가 이렇게까지 큰 줄 몰랐어요. 그저 삶을 바쁘게 사는데만 급급해 보였던 그들도 옛 것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 것을 더욱더 잘 보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네요.”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북촌을 찾았고, 북촌 또한 한옥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한옥 마을 끝에는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들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많은 카페와 상점들이 있었다.
식혜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며 그는 젊은이들의 열기 속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했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거는 희망 또한 마음에 담고 북촌길 여행에서 돌아왔다.
이원복 ㅣ 1946년 대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상경, 미술을 좋아했던 어린 이원복은 현 정독도서관에 자리했던 경기 중·고를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 건축학과에서 수학하고 1975년 독일 뮌스터 대학의 디자인학부에 유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같은 대학 철학부에서 서양미술사도 전공하며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먼나라 이웃나라』로 국내에 연재하게 되었다. 이 저서는 글로벌 시대를 열어준 국민만화로 천대 받던 만화 시장에 어른들도 즐기는 교양만화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통로가 되었다. 현재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쓰고, 글로벌 시대 문화 통역자로서의 역할도 계속 해나가고 있다.
글·김진희 사진·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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