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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경복궁 복원과 하느님 숭배사상

chamsesang21 2008. 11. 5. 13:28

제 14 장 경복궁 복원과 하느님 숭배사상

 

1. 한양의 신성 공간인 경복궁

 

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기 1392년 7월 17일, 그의 나이 58세 때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태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과거 세력들이 남아 있는 개성을 피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가게 된다.

태조가 처음에 새 도읍지로 정한 곳은 계룡산 아래였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그곳은 새 도읍지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에 의해 주춧돌만 남긴 채 취소되었고, 무학대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양, 곧 지금의 서울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했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후 궁궐 터를 정할 때도 여러 사람의 의견이 분분했다. 최후까지 논의된 두 가지 안은 무학대사의 주장과 정도전의 주장이었다. 무학대사는 한양의 지세로 보아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고,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했다.

태조는 이 두 가지 배치 계획을 놓고 고민한 끝에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경복궁을 지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국가의 존망이 200년 이내에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심히 안타까워하고 왕사 자리를 마다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경복궁은 태조 3년(1394) 12월 3일 공사에 착공, 제사인 개기제(開基祭)를 지낸 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태조 4년(1395) 9월 25일 준공되었다. 그러나 4년 후인 1399년 왕가의 형제들 사이에 골육상쟁이 일어나자, 한양이 불길하다고 생각한 정종은 수도를 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등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한 기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이때 개성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한양으로 옮기되 모악산 아래쪽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 본래 태조 이성계가 자리잡았던 경복궁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여러 중신들을 모아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얻을 수 없자 마지막으로 점괘에 의존했다. 결국 한양은 2길1흉(二吉一凶)이며, 개성과 모악산은 1길2흉(一吉二凶)으로 한양이 가장 유리하다는 점괘가 나왔고, 이 점괘에 의해 태종 5년(1405년)에 수도를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 조선 왕조 통치 시대를 열어 나갔다.

경복궁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내려온 평탄한 용의 중심맥 위에 임좌병향(壬座丙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태조는 경복궁의 위치를 결정한 후 동쪽에는 종묘(宗廟)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 전래의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또 경복궁 남쪽에는 원구단(圓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 원구단은 종묘와 사직보다는 약간 뒤늦게 설치되었지만, 조선 왕조가 정신적 지주를 하느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경복궁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쪽에 북악산,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 남쪽에 원구단 등 사방 배치를 이루고 있어 평면상으로는 십자의 중심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여러 공간은 모두 왕이 신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는 점을 공통으로 하고 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신성한 일이며, 이런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 역시 신성한 공간이다. 더욱이 왕이 국가를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므로 그곳은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따라서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악산과 원구단을 연결하는 남북의 축과, 종묘와 사직을 연결하는 동서 축에 포함된 원형 내부 공간은 조선 왕조에 의해 이루어진 신성 공간이다. 이 신성 공간의 기준은 북악산이다. 북악산은 한양을 수호하는 진산으로서 가장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가에 위급한 일이 발생하거나 천재지변 등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 진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므로 이 북악산은 한양과 조선 왕조를 수호하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가. 경회루(慶會樓)

 경회루는 경복궁 안에서도 가장 운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건물 규모에 있어서도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규모로서, 경복궁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경복궁은 1412년 건축된 이래 몇 차례의 수리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외국 사신들의 접대 장소 외에 과거시험장, 활 쏘는 장소, 집현관들의 강의 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다.

경회루는 네모 반듯한 연못에 세 개의 섬을 만들고 다시 그 섬 위에 높이 누(樓)를 올린 독특한 공간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시대의 고유한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저, 사각형 연못 속의 세 개의 섬은 한국의 전통 사상인 삼신사상(三神思想)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삼신사상이 나타난 최초의 건물은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이다. 삼신사상에서는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 신선이 살고 있는 세 개의 산을 ‘삼신산’이라고 한다.

경회루 연못의 세 개의 산은 곧 삼신산을 상징한다. 삼신사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연못이나 정원에 세 개의 돌을 세워 놓고 삼신산이라고 하고 있다.

또 경회루는 섬에 세워져 있어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 역시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삼신사상에 의한 것인데, 세 명의 신이 경회루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개의 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도 세 개의 출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삼신이 각각 출입하기 위한 것이다.

경회루의 평면 형태는 정면 7간(間), 측면 5간의 총 35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평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공간은 3간이며, 3간으로부터 전후좌우 각각 3중의 기둥을 두었다. 이 3간 공간 역시 삼신을 상징한다.

일부 문헌에는 경회루의 삼신사상이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 사상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삼신사상을 정책적으로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신은 곧 하느님을 의미한다.

경회루의 형태는 1층이 전체적으로 돌기둥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이 기둥 상부에 목조 기둥과 마루를 올린 구조이다. 돌기둥 평면 배치 역시 전면은 7간이며, 측면은 5간이다. 돌기둥 형태를 보면 가장 외부에 있는 24개의 돌기둥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반해, 그 내부에 있는 24개의 돌기둥은 원형을 이룬다. 이처럼 같은 층에 있는 기둥을 위치상으로 외부와 내부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한국의 독특한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처럼 외부의 사각형 기둥 공간은 인간의 공간이며, 원형 기둥 공간은 신의 공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경회루의 외부로부터 중심 공간에 이르는 공간 형태 변화는 곧 인간 세상으로부터 신의 세상에 도달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경회루 1층 전체를 돌기둥으로 받치고 마루를 높은 곳에 세운 구조는 사람이 하늘에 쉽게 오름으로써 하느님에게로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하늘에 가깝게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구조물은 2천 년 전에 세워진 고인돌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고인돌 상부에 있는 돌은 평탄한데, 왕과 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은 죽기 전에 이곳 덮개돌에 모셔지고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죽음에 이르렀다. 그들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죽음으로써 영혼이 하늘 나라로 쉽게 올라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회루의 높은 돌기둥 구조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이 신선 또는 하느님과 쉽게 만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분석된다.

경복궁의 근정전이 정치를 집행하기 위한 공간이라면 경회루는 인간의 간절한 희망을 성취시켜 주는 공간으로서 환희의 공간이다. 경회루에서 풍악을 울리며 연회를 즐기는 동안 인간은 현실 세계를 떠나 신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신의 공간에 도달하려는 목적은 삼신의 공간에서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받아 인간 세상에 고루 펴 홍익 세상을 만드는 데 있었으며, 이것은 곧 단군의 개국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한양의 중요한 공간을 삼신오제의 하느님 숭배사상의 상징적인 형태로 만든 이유는, 한양이 하느님을 숭배하는 공간이며 한양을 하늘의 뜻을 이어받는 지상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당시의 건국 의지를 나타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표면적으로 남기지 못한 것은 하늘을 직접 섬기지 못하도록 하면서 큰 나라 구실을 한 중국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 근정전

 근정전은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국왕의 즉위식이나 공식적인 대례(大禮)를 행사하는 정전(正殿)으로서, 경복궁을 대표하는 가장 큰 건물이다. 근정전의 평면 구조는 정면 5간, 측면 5간이고, 지붕은 중층으로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은 2층으로 각 방위에는 12지(支) 석상이 조각되어 있다.

근정전 정면에는 신하를 직책에 따라 배열하는 널찍한 마당인 명당이 있으며, 근정전과 명당 주변 4면에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이 회랑은 근정전 내부와 외부 공간을 차단함으로써 근정전 내부를 근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듯 근정전을 중심에 두고 4면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 배치는 한국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건축 형식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삼신오제 사상에 근거한다. 즉 4면에 있는 회랑은 동서남북의 수호신 즉 청룡, 백호, 주작 그리고 현무를 말하며, 이 4면의 건물은 근정전까지 포함해 5방위를 이루게 된다. 중앙 근정전에 앉아 있는 왕은 4면을 지키는 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의 뜻을 모든 백성들에게 펼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근정전의 공간 형태는 삼신오제 중에서 오제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편 근정전 바로 뒷면에 있는 사정전(思政殿),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 등의 건물은 삼신을 상징한다. 이 중 사정전은 근정전과 같은 중심축 위에 있고, 다른 두 개의 건물은 근정전을 향하고 있다. 삼신의 상징적인 공간 형태는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로 각각 구분하는데, 이 중 태일이 가장 크다. 그리고 중심에 있는 건물이 태일이 되고, 동쪽에 있는 건물은 천일, 서쪽에 있는 건물은 지일이 된다.

따라서 중심에 있는 사정전은 태일에 속하고, 만춘전은 동쪽의 양(陽)에 해당되어 천일을 의미하며, 천추전은 서쪽의 음(陰)에 해당되는 지일을 의미함으로써 삼신당이 된다.

 

2. 종묘(宗廟)

 

종묘는 경복궁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가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다. 왕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종묘에 먼저 보고를 했고, 이후 신하들과 의결한 후 시행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인 종묘가 우리 나라에 처음 나타난 것은 삼국 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남해왕 3년(서기 6)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고구려는 대무신왕 3년(서기 20)에 시조동명왕묘(始祖東明王廟)를, 백제는 온조왕 원년(B. C. 18)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조선 태조는 경복궁이 완성되기 전에 친히 답사한 후 종묘 터를 잡았고,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9월 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공사 현장에 자주 나가 공사를 독려하는 등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종묘가 왕이나 국가에 상당히 중요한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종묘가 완공되자 태조는 개성에 있던 자신의 고조, 증조, 조부, 그리고 아버지 등 4대 신위를 옮겨 와서 봉안했으며, 이후 태조부터 27대 순조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이곳에 봉안됐다. 선조 25년에는 왜군 침입으로 왕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때도 종묘의 신위는 왕과 함께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피난길에 올랐었다.

 

3. 사직단(社稷壇)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0.9킬로미터 떨어진 인왕산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인왕산이 경복궁의 백호이므로 사직단은 백호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 두 개의 단을 합하여 부르는 것으로, 사단은 국토의 신을 모시는 단을 말하고 직단은 오곡의 대표를 지칭하여 모시는 단을 말한다. 이 두 개의 단 중 사단은 동쪽에 있고, 직단은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땅의 생산적인 기능과 땅으로부터 수확되는 곡식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은 사람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왕은 모든 국민을 대표해 이곳에 와서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직접 제사를 올린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4. 원구단(圓丘壇)

 

원구단은 왕이 하느님에게 직접 제사 지내는 제천 공간으로서 태종 11년(1411)에 축설, 경복궁 남쪽 1.4킬로미터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이 이곳에 조선호텔을 세우는 바람에 철거되고 말았다. 다만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던 황궁우(皇穹宇)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조선호텔 옆에 있는 3층짜리 팔각정 건물이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기 앞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도 이곳이다. 이와 같이 원구단은 국왕의 즉위식이나 제천행사 등을 치른 만큼 실제로는 종묘나 사직단보다 더욱 차원이 높은 공간이었다. 왕이 하늘로 제사 지내는 것을 원구제(圓丘祭)라고 하는데, 원구제의 역사는 단군 이래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민족의 전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성종 2년에 하느님과 오제(五帝), 즉 청제·적제·황제·백제·흑제를 모두 함께 모시는 원구단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는 1457년(세조 3)에 정월 15일을 제천일로 정하고, 의복을 갖추고 원구단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 이후에는 원구제를 지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외부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11년(1385), 명나라에서 온 사신은 한국 전래의 하느님 숭배사상에 대해 “중국의 천자는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있으나, 그보다 신분이 낮은 제후 국가의 왕은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없고, 다만 하느님보다 신분이 낮은 산천에나 기도해야 한다”고 위협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일제 시대에는 한국의 고유 신앙이 강압적으로 말살됐고, 오직 일본의 신사(神社)만을 유일한 종교로 받들도록 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서구의 신앙이 들어왔고, 하느님을 숭배하는 사상은 점차 약화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초라한 원구단은 마치 잃어버린 독립국가의 혼과 같아 국가의 앞날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5. 한양의 4대문

 

한양 4대문의 이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각 방위로 구분하여 나타낸 것이다. 즉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있는 대문은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중앙에 있는 보신각(普信閣) 등 각각 인의예지신을 중심 글자로 했다. 또 보신각에는 큰 종을 달아 인경(人定)이라고 하고 밤에 28번, 새벽에 33번을 각각 쳐서 통행 금지와 해제를 알렸다.

이 인의예지신의 오상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 기준을 말하며, 보신각의 종소리는 오상 중에서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오상 이론은 삼신오제 사상 중에서 오제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문

명   칭

오 상

오 행

오 제

사신사

1

동대문

興仁之門

동제

청륭

2

서대문

敦義門

서제

백호

3

남대문

崇禮門

남제

주작

4

북대문

弘智門

북제

현무

5

중앙

普信閣

황제

명당

 

6. 조선총독부와 조선총독관저, 그리고 서울시청

 

조선총독관저가 철거되고, 한동안 중앙청으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철거되어 경복궁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서울시청이 일제 침략의 상흔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역시 마땅히 철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제가 철거한 원구단을 다시 세워 민족 문화의 정통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가. 조선총독관저

 조선총독관저는 1937년에 착공되어 2년 후에 완공, 일본 총독의 관사 및 집무실로 이용되었다. 미나미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노부유키 등 세 명의 총독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해방된 후 아베 총독이 내부를 불태웠으나 미 군정청이 이를 개조해 하지 군정청장관의 집무실로 이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1948. 8~1960. 4), 윤보선(1960~1962. 3), 박정희(1963~1979. 10), 최규하(1980~1980. 8), 전두환(1980. 8~1988. 2), 노태우(1988. 2~1990. 10) 대통령 등 여섯 명의 대통령관저와 집무실로 이용됨으로써 51년 동안 한국의 통치 심장부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의 청와대 건물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신축되어 옮겨지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철거하여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총독관저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면적 80평의 콘크리트 건물로, 1층은 집무실·접견실·식당 등으로 이용됐고, 2층은 주침실·가족침실·거실·서재 등으로 이용됐다.

조선총독관저는 주봉이 경복궁을 향해 내려가는 내룡의 중심 부분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다른 건물들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평면 형태는 정방형 2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건설될 당시에는 현관이 서쪽에 있는 서향 집으로 배치되었으나 철거되기 직전에는 현관이 건물 남서쪽에 있었다. 여러 차례의 증축 공사를 거치면서 초기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 건물이 철거될 당시, 필자는 건물 철거 방법에 따른 자문 요청을 받아 건물을 면밀히 살필 기회가 있었다. 건물 평면의 전체적인 형태는 정사각형에 가까웠지만, 평면 형태가 대(大)자를 이루고 있다는 일부 설에 대해서는 많은 증축에 의한 변형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필자는, 지상 구조물은 물론 지하의 콘크리트 기초 부분도 완전히 제거하고 그 자리에 서울 사대문 안의 공사장에서 출토되는 마사토로 원래의 지반 형태에 따라 성토하도록 건의했다. 또 철거 공사를 완료한 후 건물이 있던 중심에 구 건물에 대한 표석을 세울 때는 용의 중심을 피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세울 것도 건의했다. 소문에 의하면 일제 당시 총독이 관저를 세우기 전, 한국인 지관에게 관사 터를 물색하라고 했는데 이 지관이 일부러 좋지 못한 곳을 선정해 주었다는 말도 있었다.

 

나. 조선총독부 건물(구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식민 통치의 본부 건물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신축하기로 했을 때,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등 중요한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지으려고 설계까지 완료했었다. 이 계획은 한국의 전통 문화 흔적을 말살하고 일본 건축을 위엄 있게 세움으로써, 한국을 영원히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16년 총독부 건물 기공식을 하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근정전과 경회루 철거 계획을 보류했다. 그 대신, 총독부 건물을 근정전 바로 앞에 세움으로써 근정전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총독부 건물은 한국을 일본의 점령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평면 형태도 일(日)자를 이루게 하는 한편, 총독부 건물 앞에 위치한 현재의 서울시청 건물의 평면 형태를 본(本)자로 만듦으로써 서울 한복판에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았다.

 

다. 현 서울시청 건물

 현재 서울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926년 경성부 청사로 세워져 사용되다가 해방과 함께 서울시 청사로 이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초기에는 2천500평에 불과했으나 서울시 조직이 증가하면서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6천여 평에 이르고 있다. 그래도 사무실이 부족해 서울시는 본관 이외에 서소문 별관, 서대문 별관 등 주변의 여러 건물에 분산되어 있다.

서울시청 건물은 북악산과 경복궁, 그리고 원구단을 연결하는 서울의 신성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청과 남대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상징적, 지리적으로 중심에 있는 이 건물은 일본이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한국의 정기를 말살하고 침략을 영구화하려는, 침략 근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건물이다.